이수미(안양예술고등학교)

어제 내린 비

마디 굵게 내리던 고드름이 비를 맞고는 뚝뚝 울고 있다. 어제는 하루 종일 투덕투덕 비가 내렸다. 할아버지는 댓돌에 걸터앉아 미처 들여놓지 못했던 고무슬리퍼를 내려다본다. 코가 막힌 앞쪽으로 빗물이 흘러 들어가 새치름하게 고여 있다. 할아버지는 슬리퍼를 집어 물이 빠지도록 벽에 기대어 세워놓는다. 덕에 날은 맑어서 좋네, 잘 왔다 갔어 그래. 할아버지가 뒤꼍으로 걸어가 나무더미 위에 덮어 놓았던 푸른 천막때기를 들춰낸다. 방울져 있던 빗물들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할아버지가 장작을 패기 시작한다. 도끼를 내리찍어도 살짝 틈이 생길 뿐 시원스레 쪼개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굽은 등허리에 한 손을 짚고 숨을 고른다. 오히려 할아버지 허리가 장작패기 당한 것처럼 쩌억쩌억 갈라지는 것만 같다. 이래 살아 뭐 하노, 안 살려고 하니 안 살 수도 없고. 할아버지는 낮게 중얼거리다가 다시금 도끼 손잡이를 짧게 고쳐 잡는다.
할아버지는 겨우 네 토막을 낸 장작을 들고서 부엌으로 들어간다. 벽돌을 끌어다 놓고 앉아서 쏘시개로 아궁이 속을 엎치락뒤치락 솎아준다. 다홍빛으로 달아오른 아궁이 불에 장작을 하나씩 꽂아 넣는다. 할아버지가 팔을 뻗어 방과 연결된 문을 열고 할머니를 살핀다. 개어놓은 이불 위로 반쯤 몸을 누인 할머니가 보인다. 할머니는 꼼짝 않고 누워서 할아버지가 하는 양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솥뚜껑을 연다. 물이 잔뜩 졸았다. 조금만 늦었어도 일이 날 뻔 했다. 할아버지는 대야에 받아뒀던 개울물을 솥에 부으며 할머니가 솥을 살피던 때를 떠올린다. 솥 안에 넉넉하게 담긴 물은 그 속이 항시 뜨겁게 끓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화로에 아궁이 불을 옮겨 담고 뚝배기를 얹는다. 솥에서 물을 떠다 넣고 된장을 푼다. 간단하게 고추와 파만 가위로 쫑쫑 잘라 넣는다. 가위 손잡이가 할아버지 손처럼 잔뜩 부르튼 채 투박하게 굳어있다.
할아버지가 접이식 상에 찌개와 밥 두 그릇, 김치와 두릅나물을 차려 아슬아슬하게 방으로 건너 들어간다. 할머니는 상을 건네받지 않고 몸을 일으켜 앉기만 한다. 할아버지는 상을 할머니 쪽으로 끌어다 놓고 상자에서 연고형 진통제를 꺼낸다. 웃옷을 걷어 올리자 때꾼하게 버쩍 마른 등허리가 드러난다. 진통제를 덜어 발라보지만 손이 잘 닿지 않아 허옇게 뭉친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발라달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할머니는 영감님이 아프다고 해도 더 이상 꼼꼼히 약을 펴 발라 줄 수 없다.
할아버지는 밥을 먹으면서 할머니를 흘긋흘긋 쳐다본다. 할머니는 먹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밥을 먹다말고 지게문을 열어젖힌다. 흙마당에 군데군데 고여 있는 작은 물웅덩이들이 보인다. 날 펴서 뒤에 산에 좀 가야지.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앞세워 다시 뒤꼍으로 걸어간다. 노부부는 초가 뒤로 이어진 낮은 산등성이를 오른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자 평평하고 좁은 터가 드러난다. 왼편에 봉분이 솟아있다.
앞서 걷던 할머니가 봉분 쪽으로 다가간다. 이내 사라진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걸어 들어간 묘 주위를 둘러 걸으며, 마른 풀 사이로 삐죽이 나라난 것들을 뽑아내고 또 쓰다듬는다. 할아버지는 묘 오른쪽에 비워 놓은 터를 다시 둥글게 맴돌다가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묘가 보이도록 모로 눕는다.
마주한 묘 뒤로 깨끗이 갠 하늘이 끝없이 이어진다.
할아버지 볼에 빗물이 묻는다.
땅은 여전히 비를 담뿍 머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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