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자운고등학교)

낯선 가방

화창한 일요일 아침 엄마와 나는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위로 덜덜 소리를 내며 케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엄마와 나는 여행 다니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여행은 항상 새로운 도전이고 신선한 충격이다. 세계 속에 있는 새롭고 아름다운 곳들을 다녀온 이후 최소한 일주일 동안은 일상으로 돌아오기 어렵다는 휴우증이 있긴 해도 그건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행복한 증상이다. 엄마와 나는 공항가는 버스를 타기위해 정류장으로 갔다. 시간에 맞춰 버스가 도착했고 짐칸에 가방을 넣었다.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 잠시 동안의 일상탈출이라는 생각에 달콤함이 온몸에 펴졌다. 버스로 인천공항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엄마와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웃고 수다를 떨었다. 우리가 떠나는 곳은 중국이었다. 주변에서 중국은 최소 일곱 번은 다녀와야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번이 첫 여행이었다. 그래서 더 떨리고 두근거렸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버스는 인천공항 입구 앞에 세워졌다. 시간여유도 있고해서 사람들이 다 내리고 난 뒤 내리기로 했다. 내 마음이 즐거워서인지 내리는 사람들의 손에 보이지 않는 행복함이 쥐어져있는 것 같았다. 이제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인천공항의 북적함을 느끼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아저씨 한분이 서게셨고 엄마는 그분께 우리가방을 꺼내 달라고 하셨다. 아저씨께서는 흔쾌히 짐칸에서 우리모녀의 검은 케리어 두 개를 꺼내주셨다. 얼른 받아들고 공항을 향했다. 우리는 여행사에서 가는 단체여행이었기 때문에 일행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롯데관광 피켓을 든 가이드 언니와 그 뒤로 유쾌한 여행에 함께할 스무 명 쯤으로 보이는 이들이 시끌벅적한 웃음소리로 공항을 메우고 있었다. 인원확인이 끝난 뒤 엄마와 나는 짐을 붙이러 갔다. 그런데 순간 케리어 손잡이 부분에 쓰여있는 이름을 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내 이름도 엄마이름도 아닌 어떤 낯선 여자의 이름이었다. 아마도 버스에서 짐을 내릴 때 바뀐 것 같았다. 우리 가방이 아닌 것을 확인한 뒤 분주해보이는 사람들의 틈을 가로질러 안내데스크로 달렸다.
이제 비행기 출발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을지 몰라도 마음의 여유는 이미 높푸른 하늘 위로 날아가버렸다. 우리와 다르게 무척이나 침착해 보이는 안내원은 아이를 통해 인천공항에 울려퍼지도록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시 도봉구에서 오신 김미경 님의 가방과 바뀌신 승객께서는 급히 정문 앞 안내데스크로 와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다시한번…….”
계속된 안내방송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타나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검은 양복을 입은 공항직원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죄송하다고 몇 번이나 사과했고 몇 가지 옷과 생필품을 사주겠다고 했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즐거운 여행의 시작을 찌푸린 얼굴로 맞이하기는 싫었다. 그렇게 공항에서 산 옷과 생필품 몇 가지 그리고 공항 측의 실수로 만나게 된 낯선 여행가방과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공항에서의 당혹감을 날리기에 충분했다. 중국에서 하룻밤이 지나갈 무렵 그사이 친해진 언니 두 명이 심심하다며 우리숙소에 놀러왔다. 나와 엄마 그리고 언니들은 그 낯선 가방 앞에 앉아 아까 아침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때 한 언니가 말했다.
“우리 이 가방 열어볼래? 기왕 이렇게 된 거 그쪽도 열어볼 거 아니야.”
열어본 가방 속에는 편한 반팔티와 반바지만 쑤셔넣은 우리와 달리 예쁘고 하늘하늘해 보이는 옷들이 가득했다. 가방을 열어보고나니 그쪽에서 바뀐 가방의 내용물을 보고 황당해 할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다.
우리는 낯선 가방과 함께 길고 긴 첫 중국여행을 끝냈다. 공항에 돌아와 사정을 들어보니 우리가방을 가져간 그쪽은 하와이로 놀러간 가족이고 그 중 부인의 가방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며칠 후 명동거리는 초인종 소리와 함께 케리어가 도착했다. 하와이 해변에서 따가운 태양빛을 받으며 여행하고 돌아왔을 가방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후로부터 엄마는 해외여행을 갈 때면 항상 손잡이 부분에 남색 물방울무늬 손수건을 묶어논다.
다음부터는 당황해하지 않기 위한 우리 모녀와 공항 직원들 그리고 다른 이의 가방을 들고 황당해할 그 누군가를 위한 엄마의 작은 배려이다. 화를 내려면 낼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또한 여행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뜻밖의 일들이 찾아와 힘들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공항에서처럼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예상치 못한 경험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언제든지 즐거움에서 슬픔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엄마와 내가 공항직원에게 화를 내고 여행가서도 계속 투덜거렸다면 오랫만에 주어진 즐거운 시간을 무의미하게 올려보냈을 지 모른다.
공부하다가 답답함이 느껴질 때면 읽는 유럽배낭 여행 책의 저자는 아무리 여행신이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도 밀려오는 여행의 유혹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살아있음에 대한 역동성과 경이로움은 아무도 이기지 못할테니까 말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때의 그 추억이 상쾌하게 내 뇌리를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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