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29 발간 1195호

학습(學習)은 『논어』의 학이편을 시작하는 학이시습지(學而時習知)에서 따온 표현이다. 역자에 따라서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배우고 익힌다”라는 번역은 너무 소박한 것 같다. 습(習)자는 새가 알을 깨고나와(白) 날개 짓(羽)을 하는 형상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살아나기 위한 한 생명체의 몸짓이니 자연스럽다. 그러나 배움의 뜻을 지닌 학(學)자가 삶의 실천인 습자와 결합했을 때에는 이 자연스러움이 힘겹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렇다고 지레 손사래만 칠일은 아니다. 학습인 “배움을 실천하다”는 사람이 되는 법일 덕(德)을 심고 쌓는 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요즈음 교육계의 비리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학습에 전념해 교육의 백년지대계를 구축해야 할 사람들이 사사로운 이권에 몸 바치는 꼴은 한 나라의 미래를 오염시키는 맹독성 폐수의 방류와도 같아 보인다. 학의 모자람보다는 습의 무지에서 나온 결과라고 하겠다. 학은 축적이고 습은 비움이다. 비움은 채움의 전제조건이다. 비움이 있을 때 비로소 채움의 풍요를 경험한다는 것을, 축적된 것을 실천으로 쏟아내는 일은 곧 자기 영혼의 소리를 듣는 행위라는 것을 학습의 권위자일 교육계 인사들이 깨달을 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이러한 소망이 최근 모 방송국 개그프로그램의 한 개그맨을 통해 독설로 뿜어져 나왔다. 공식적으로 밝혀지고 그래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지만, 알면서 속아 왔고, 보고도 넘어가야 하는 문제이기에, 그의 일갈은 단순한 공감을 넘어 뒷북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마저 내면의 자기 울림을 경험하게 해준다. 이러한 울림을 애써 외면하는 자들은 어찌 보면 설익은 감과 같은 존재다. 이 감은 자기가 남한테 떫은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카바이드의 힘을 빌려 달콤함을 얻은 감은 표가 난다. 겉만 번지르르해서 상품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속성의 티가 깊이 없는 그 맛에서 그냥 난다. 우리는 이 맛을 구별해내지만, 그래서 항상 시간의 세월 을 묵묵히 인고하고 자라나는 존재의 깊은 맛에 감동을 하지만, 막상 그것의 실천 앞에서 얼마나 많은 망설임으로 자기 자신을 재촉하고 있는지 모른다. 채찍이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촉박 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가 너무 눈에 많이 보인다. 이런 자들이 권력의 위치에 있다면, “나만 아니면 돼”가 얼마나 범람할 것이며, 그로 인한 내가 아닌 당신들의 피해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학습의 진정한 이해가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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