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 배경에 두 여성의 얼굴이 반쪽씩 형상화 돼있는 특이한 포스터. 이 개성 강한 포스터는 영화제 기간 동안 신촌에 가득했다. 이 얼굴의 반쪽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얼굴이고 다른 한쪽은 현대 젊은 여성을 상징한다. 이는 지난 역사 속에서 여성의 용감하고 쾌활했던 면모를 찾아내고 10년 동안 계속돼 온 여성영화제를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난 4월 8일부터 15일까지 신촌 아트레온 극장에서 열린 ‘제12회 여성영화제’에서는 27개국 102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예술영화부터 코미디, 멜로와 같은 대중영화, 여성주의적 미학을 담은 실험영화까지 다채로운 영화들이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올해의 주된 테마는 ‘모성’이었다. 이는 저출산, 일하는 여성의 육아, 싱글 맘 등 최근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모성에 대한 의미를 되짚자는 의미에서 선정됐다.
개막작으로는 정치운동을 하던 엄마에게 버려진 딸이 성장해 엄마를 찾아 복수하는 내용이 담긴 <다가올 그날>(2009, 독일, 수잔네 슈나이더)이 상영됐다. 이 외에도 레드마리아(2010, 한국, 경순), 여행자(2009, 한국, 프랑스, 우니 르콩트)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국내의 수많은 영화제 중, 여성영화제가 특별한 이유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과 관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행사와 이벤트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올해에도 영화 상영과 함께 △국제학술대회 △문화공연 △국제워크숍 등 20여 개의 부대행사가 진행됐다.


아트레온 극장이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들과 홍보포스터, 시끌벅적한 모습에서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기념품 부스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구경을 했고 여성단체 <민우회>는 홍보를 하며 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도 야외행사를 구경하며 여성영화제에 관심을 보였다.
또한 입구 쪽에 작은 벽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는 <민우회>에서 진행한 행사 중 하나로, 여성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듣자는 취지에서 기획됐다. 이 벽에는 여러 가지 문구가 쓰여 있는 종이가 붙어있었다. ‘내가 여성영화제에 온 이유는 ~이다’ ‘내가 여성주의자 인 것은 ~때문이다’와 같은 기본문구에 관객들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적었다. 한 관객은 ‘내가 여성영화제에 온 이유는 여자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적어 영화제를 찾는 이들에게 폭소를 자아냈다.
2층 매표소에는 관객들이 영화를 구매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있었다. 정오 경,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화들이 매진된 상태였다. 영화제의 자원봉사 팀장인 최필석씨는 “오전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만석인 경우가 많아요. 주말 같은 경우는 대부분 전 회 매진을 기록해요”라고 했다.
아트레온 극장 2층에는 분홍색으로 꾸며진 이 카페가 마련돼 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이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카페는 여성영화제의 후원사인 ‘메리케이’가 제공한 것이었다. 메리케이 등 여러 기업과 문화체육관광부, 서울특별시 등 국가기관이 여성영화제를 후원했다.
카페 앞으로 갑자기 분홍색 자전거 5대가 지나가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자원봉사자들은 홍보를 위해 이 자전거를 타며 아트레온 극장의 안과 밖을 돌아다녔다. 이 외에도 1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영화제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화 입장을 기다리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영화제를 몇 번째 방문했는지, 기대한 작품은 무엇인지, 행사에 만족하는지 등 영화제에 대한 관객들의 만족도와 의견을 물어보는 질문이 담겨있었다. 여성영화제가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할 수 이유 중 하나는 이와 같이 관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외에도 관객과의 소통은 여성영화제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30여회의 ‘감독과의 대화’를 주최해 일방적인 영화 상영이 아닌 관객과 영화가 서로 소통하는 장을 만들어냈다. 아트레온 열린광장에서는 △작가와 뮤지션의 만남 △소설의 원작자와 영화감독의 만남 등 다양한 볼거리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10일에 열린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만남’ 행사에서는 영화 <밀애>의 변영주 감독과 영화의 원작인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의 전경린 작가가 자신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보냈다. 영화 제작할 때 발생한 웃지 못 할 에피소드, 변 감독이 원작소설을 읽고 느낀 점과 같은 진솔한 생각을 들으며 관객은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에 전 작가는 소설 중, 자신이 좋아하는 구절을 낭독해 관객들에게 특별한 시간을 안겨줬다. 전 작가의 차분한 말투에 간간히 사투리가 섞어져 나올 때면 관객들과 변 감독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사소한 것에 그들은 함께 웃으며 여성영화제를 만끽하는 듯 보였다.
올해 여성영화제는 단지 여성, 영화에만 집중된 영화제가 아니었다. 문화와 지역사회로 한 발 더 나아간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취지를 살리기 위해 신촌과 홍대의 지역문화를 관객과 함께 만드는 ‘나의 문화지도 그리기’ 행사가 진행됐다. 관객이 직접 신촌 주변의 맛집과 명소를 지도에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게릴라 공연 △퀴어나잇 △아시아 여성영화인의 밤 등 10개가 넘는 행사가 진행됐다. 포스트잇에 한 줄을 남기는 작은 행사부터 공연까지 활발히 참여하는 관객들로 생기가 찼다.
영화제를 찾은 류소담(26ㆍ여) 씨는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일반극장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주제와 소재를 담고 있기에 매년 찾아요. 여성과 인권에 대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관객의 대부분이 여자일거라는 편견은 틀렸었다. 젊은 남성 관객도 꽤 눈에 띄었다. 손창대(21ㆍ남) 씨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여성’과 ‘모성’이라는 테마가 다소 부담스러웠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남자의 시선으로 못 보는 것들을 영화를 통해 볼 수 있었어요. 세상을 보는 시각이 넓어진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제1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올해 관객점유율 90%를 기록하며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서의 위상을 확인했다. 또한 총 관객 수는 4만1,654명으로 지난해보다 10% 증가했다. 해가 거듭할수록 여성영화제는 특정계층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장으로 확대돼 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제 초보부터 마니아까지, 젊은 20대 커플부터 50대 노부부까지, 영화에 대해 공부하러 온 영화 학도부터 여자가 많기 때문에 이곳을 찾은 남성 관객까지 여성영화제를 찾은 이들은 다른 영화제와는 다른 감상을 느꼈을 것이다. 여성영화제의 영화는 사회의 모든 것을 여성의 시작으로 재조명한다. 매년 영화제에서는 ‘모성’ ‘부부관계’ ‘동성애’ ‘노동’과 같은 소재에 대해 전통적인 사고를 버리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몫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영화제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은 새로운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는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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