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사무관 이유진(경제 99졸) 동문 인터뷰

"불합격이 두렵다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도전을 포기하지 마세요"

2008년, IMF 이래 최대의 경제 위기가 닥쳤다. 그 이후 ‘경기 불황’ ‘불경기’라는 단어가 흔히 쓰이고 ‘최저 수준의 실업률’은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이에 따라 자신의 꿈은 버려둔 채 무작정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02년도 행정고시 합격자로서 통일부 사무관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유진(경제 99 졸) 동문. 행정고시라는 거대한 벽을 넘어선 그녀가 꿈을 잃어가는 대학생들에게 자신의 희망과 도전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고등학교 때까지 이과 출신이었다는 이 동문은 경제학과에 입학하기 위해 교차지원 제도가 잘돼 있는 우리 학교의 경제학과에 지원했다. 그녀는 “막상 입학하고 나니, 바로 공부를 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선 미팅, 소개팅, 동아리 활동 등을 하며 열심히 놀았죠”라는 의외의 답변을 들려줬다. 재학 시절, 이 동문은 학교를 무척 좋아하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무척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했어요. 풍물패 동아리에 들어가서 풍물에 미쳐 살기도 하고, 한 학기 동안 과 대표를 하기도 했지요. 학점 관리에 조금 소홀하긴 했지만요(웃음)”라며 자신의 자유분방했던 대학 시절을 회고했다.

행정고시에 도전하다

활기차고 자유로운 대학시절을 보낸 그녀. 그런 그녀가 어떻게 행정고시에 도전할 마음을 가지게 됐을까? 대학교 1학년 시절, 이유진 동문은 전국 총학생 연합회 출범식에서 장기수로 30~40년을 살다 풀려나온 할아버지들을 만나게 됐다. 그 때 이 동문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몇 십 년의 감옥 생활을 버티게 했는지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또 다른 의문은 그녀의 풍물패 선배들로부터 생겼다. 대학교를 졸업한 풍물패 선배들이 풍물에 빠져, 풍물을 업으로 삼은 것이다. 그녀는 이를 통해 ‘사람들이 저마다의 가치에 따라 다양하게 살아가는구나’ 라는 사실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저도 한 가지에 미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심한 것이 행정고시였어요”라고 말했다.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녀가 행정고시에 합격하기까지 걸린 햇수는 총 4년. 3학년 2학기에 공부를 시작한 이래 휴일을 모두 반납하고 행정 고시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 기간 내내 과외를 병행했던 것도 고생스러웠다. 이 동문은 “25살에 처음 1차를 붙었어요. 그러다 25살 7월에 2차에 한번 떨어지고, 26살 7월에도 또 한 번 떨어졌죠”라며 “같은 과 친구들은 좋은 은행, 증권 회사에 취직해 있는데 저는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이 없어 크게 좌절했어요”라고 당시의 착잡했던 심정을 토로했다. 특히 졸업을 앞둔 24살 여름에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졸업 후 미래가 확실하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죠. 그런데 막상 대학을 졸업하니까 오히려 스트레스가 더 적어지더라구요. 학업을 더 이상 병행하지 않아도 되니까 하루 온종일을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거든요” 때문에 그녀는 학우들에게 졸업에 대해 너무 조급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 후 이 동문은 절치부심으로 공부한 끝에 2002년, 27살이 되던 해에 드디어 합격의 기쁨을 맞았다.


행정고시 준비기간 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묻자 이 동문은 다름 아닌 체력을 언급했다. 밖에서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던 그녀는 합격을 위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해야 했다. 이로 인해 이 동문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졌다. 이 때 시작한 것이 바로 조깅이었다. 이유진 동문은 고시 준비를 마음먹은 학우들에게 “고시는 장기적인 마라톤이에요. 여학생은 체력이 부족해 막판 뒷심이 부족한 경우가 많죠. 조깅을 해주면 혈액순환이 되고, 몸도 튼튼해지니까 꼭 운동과 공부를 함께 병행하길 바래요”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 동문은 대학 생활에서 공부를 바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학교에 와서도 바로 취직을 하려고 공부한다면 그건 고등학교의 연장일 뿐이잖아요”라고 말하며 “방황도 하고, 여러 난관에 부딪히면서 ‘내가 이것을 반드시 해야겠다’라는 꿈을 찾고, 마음을 먹은 후에 움직이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라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이 동문은 “안정적인 삶을 위해 막연히 취직을 하는 것보다 목표를 갖고 도전하는 것이 멋있죠. 우리 학교 후배님들이 요새 자신감도 많고 패기도 있다고 들었어요. 학교도 점점 발전해가고 정계, 법조계 등 어디에 가든지 숙명여대 선배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남들이 ‘니가 되겠어?’라고 하더라도 꿈을 향해 과감히 도전했으면 좋겠어요”라며 후배들에게 애정 어린 말을 남겼다.
그녀는 25살에 사법시험을 봐서 군법무관이 된 자신의 과 동기를 예로 들기도 했다. 로스쿨에 가기 위해 뒤늦게나마 열심히 공부를 하던 그 친구는 2년 만인 27살, 로스쿨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불합격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렸던 열정이 통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규정지을 때는 내가 그동안 해놓은 것만을 보고 생각한다고 해요. 예를 들어 내가 서울대가 아니고 숙대이기 때문에 그들은 ‘넌 7급 공무원 시험 봐’ 이렇게 얘기해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존감을 가지고, 내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사람에게 큰 꿈이 있고 목표가 있다면 무엇이든지 못할 바가 없다는 말이었다.
덧붙여 이 동문은 학우들에게 나이 먹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동문도 행정고시에 합격하기 전까지 자신이 나이가 많고, 공부의 시기가 이미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합격 후 연수원에 들어가니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연수원 동료 중에는 37살인 사람도 있었어요. 27살 제 나이는 오히려 어린 나이 대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에 대한 고민은 별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라며 웃음 지었다.


 “나는 ‘가치형 인간’”

이 동문은 통일부에서 남북관련 사업을 주도하는 ‘남북경협총괄과’와 북한의 문화 분석을 통해 북한 동향을 살펴보는 ‘정책분석국’에서 일했다. 또 1년에 10번 정도 해외를 방문해 대북정책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는 ‘국제협력팀분석국’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녀는 통일부 업무 중 북한 방문을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으로 꼽았다. “입사하고 처음으로 북한에 가게 됐어요. 당시 북한에 관심이 있긴 했지만 실체에 대해서는 막연했어요. 그런데 DMZ를 넘어서 북한에 간 순간 북한 군인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거예요. 12월, 그 추운 겨울날에 얼굴이 시뻘개져서 허름한 군복을 입고 서있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의 실체이구나’라고 실감했어요” 우리나라의 1950, 6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북한의 가난한 모습도 이유진 동문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무도 풀도 없는 황폐한 환경, 황소가 달구지를 끌고 길을 지나가고 도로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북한을 보니 못 살고 못 먹었던 우리나라의 과거가 생각났어요. 북한의 여성들과 아이들은 모두 영양실조에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지금 북한에서 유행하는 말이 뭔지 알아요? ‘지진아’에요.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지진아라는 말이에요. 평균 키도 우리나라보다 10센티 정도가 작대요. 성인 남자도 155cm인 사람이 많다더라구요”

그녀는 북한을 방문한 후에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남북 관계일을 하는구나’하는 사명감이 생겼다고 한다. “막연하게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북한을 바라보며 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통일이 될 거잖아요. ‘내가 이를 돕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 보람 있고 그 사명감으로 이 일을 계속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동문은 이러한 자신을 가치에 따라 삶을 사는 ‘가치형 인간’이라고 지칭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사느냐가 중요하고, 그러한 가치가 없다면 자신의 삶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녀는 통일부가 다른 부서보다 확실한 가치관을 가지고 일할 수 있었기에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공무원은 정시에 퇴근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이유진 동문은 매일 오후 10시, 11시까지 업무에 매진한다고 한다. “6시면 퇴근하는 구청이나 동사무소의 공무원들과는 달라요. 국정 감사철인 9, 10월에는 국정감사를 받으면 12시, 오전 1시까지 남아있게 되죠. 지금 남북관계가 좋진 않잖아요. 그래서 다른 부서 직원들이 ‘야 요즘 통일부 뭐하냐’ 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거기에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그녀는 미래의 청사진으로 통일이 된 후,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사이좋게 사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이 동문은 “제가 2003년에 처음 통일부에 들어왔을 때 통일이 10년 안에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통일까지는 아니어도 앞으로 5년 안에 굉장히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 예상해요”라며 통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숙명인을 위한 선배의 말

숙명여대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랑스럽다는 이유진 동문. 지나가는 후배들만 쳐다봐도 예쁘고 뿌듯하다고 했다. “숙명여대는 제가 평생을 안고 가야할 일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학교를 너무 좋아하기도 하구요” 그녀는 행시, 사시에 관심이 많은 후배들은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연락을 해달라는 말도 했다. “광화문에 오시면 밥 사드릴게요. 힘이 나게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도 해드리구요(웃음)”
‘남에게 봉사하는 공익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이 동문은 통일부 사무관으로서 앞으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할 생각이다. 그녀는 불합격이 두렵다는 이유로, 안정적인 삶을 지속하고 싶다는 이유로 도전을 포기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숙명인들은 큰 꿈을 가질 자격이 있어요. 그러니 후배 분들이 계속해서 사시, 행시, 외시 같은 큰 시험에 응시해주셨으면 합니다. 보다 큰 꿈을 가지고 용기 있게 도전하세요” 도전정신을 잃고 낮은 목표에 만족하는 우리 시대의 대학생들. 이들을 향한 이유진 동문의 말은 그녀가 도전 후에 이뤄낸 값진 성공을 바탕으로 했기에 더욱 와 닿는다. 조만간 그녀의 뜻을 이어받은 후배들이 숙명의 이름을 빛내는 그날이 다시 한 번 오기를 기대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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