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라는 이름을 들으면 ‘지구는 돈다’라는 주장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뻔 했다는 재판 이야기가 생각난다.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중세 가톨릭 시대에 살았던 갈릴레이. 천문학자로서 그의 연구는 이처럼 그 당시 팽배했던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려는 것뿐이었다.

1609년 갈릴레이는 대롱모양의 긴 통에 일반 안경용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조립해 3배율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는 네덜란드 한 안경업자가 발명한 사물을 크게 확대시켜주는 ‘기구’를 개량한 것이었다. 3개월 후 그는 힘겨운 노력 끝에 배율을 20배까지 높일 수 있었고, 약 한 달 동안 달을 관측하며 8장의 그림을 그렸다. 갈릴레이 이전에도 달을 관측한 사람은 있었지만, 그가 20배율 망원경으로 직접 달을 보며 세밀하게 그린 그림은 차원이 달랐다. 달에 있는 산 높이가 6km 이상이라는 계산까지 했던 그는 처음으로 달 표면이 거칠고 울퉁불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달 표면이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당시 사람들의 통념을 뒤집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610년,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그 다음 연구대상인 목성으로 향했다. 그는 30배율의 망원경으로 목성 근처에서 ‘별’ 4개를 발견했다. 갈릴레이는 3개월 동안 목성을 관측한 결과, 이 별들이 목성 둘레를 도는 위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로써 갈릴레이는 ‘지구만 달과 같은 위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일부 천동설 지지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본격적으로 지지하기 위해 금성이 달처럼 위상변화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완벽하리라 생각했던 갈릴레이의 망원경에도 단점은 있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시야가 매우 좁았다. 20배율 망원경으로는 달의 절반만 관찰할 수 있었고, 움직이는 행성을 계속 추적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저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에서 관측자의 호흡과 맥박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안정된 장소에 망원경을 고정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마분지로 대물렌즈 둘레를 가려 상을 훨씬 선명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평생 지동설을 지지한 갈릴레이는 끊임없이 가톨릭교회의 핍박에 시달렸다. 갈릴레이의 책은 그가 죽은 뒤에도 200년이나 금서였고, 교황청은 1990년대에 들어서 그에게 공식 사죄했다. 시대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천체 관측에 열정을 바쳤던 갈릴레이.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인류가 지금까지 이룬 ‘천문학’ 업적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초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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