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주, 산사춘 등으로 유명한 배상면주류연구소는 우리 농산물을 이용한 전통주를 발굴, 개발, 발전시키는 곳이다. 배상면주류연구소의 전 이사장이며 현재 고문을 맡고 있는 사람이 바로 한상은(국문 49년 졸)동문이다. 양재역 7번 출구로 나와 걷다보면 전통주 그림이 새겨진 배상면주류연구소를 찾을 수 있다.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조합된 그 곳에서 친할머니와 같은 인자한 인상의 한상은 동문을 만났다.

아쉬웠던 학창시절 보람된 동문활동
한상은 동문과 우리 학교와의 인연은 순탄치 만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한 동문은 가족과의 전쟁을 치뤄야 했다. 이는 당시 대학교가 보편화되지 않아 어머니가 그의 입학을 반대하셨기 때문이다. “대학보다는 시집을 가라는 어머니를 설득하기 위해 밥도 안 먹고 울면서 누워만 있었지.” 어머니와 한 동문의 ‘대학’을 건 사투는 결국 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학교에 입학해서도 한 동문의 학교생활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내가 매일 아파서 인력거로 학교에 가고 그리고 또 학교에서 오고 그랬지. 어머니가 죽지 않고 살아만 달라며 매번 걱정 하셨었어”라며 몸이 약한 탓에 학교생활에 얽힌 추억이 많이 없어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동문의 이러한 아쉬움은 졸업 후 50여년이 지난 어느 날, 학창시절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학교에 찾아가게 되면서 달랠 수 있었다. 그 때 한 동문은 총장실에서 당시 총장이었던 전 이경숙 총장을 만났다.

그는 “이 총장님이 당시 학교의 경제적, 사회적 힘든 일과 고생하시던 시절의 얘기를 해주셨는데 굉장히 감동을 받았어”라며 그 자리에서 학교에 20억을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부금은 제 2창학캠퍼스 설립에 도움이 됐고, 우리 학교 백주년 기념관 7층에는 그의 이름을 딴 ‘한상은 라운지’가 세워졌다.

이에 한 동문은 “내가 학교에 관심을 갖고 기부금을 내고 나니 주위에 다른 동문들도 학교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어”라며 20억의 값어치 보다 더 큰 수확을 얻은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그렇게 동문들이 마음을 모아 기부한 천만원, 1억원이 오늘날 제 2창학 캠퍼스를 만든 것이다. 그는 “나중에 학생들이 지금보다 더 크게 발전을 하고 좋은 계기가 생긴다면 학교에 도움을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자기 자신도 기분이 좋고 보람도 있어”라며 미래의 동문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학교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고 조언했다.

멀고도 험한 경영인의 삶
인터뷰를 위해 기자단이 찾은 배상면주가 건물의 한 곳에서는 주류를 연구하는 연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한상은 동문의 배우자인 배상면 회장은 85세의 나이에도 전통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배상면 회장뿐만 아니라 한 동문의 자녀들 모두 현재 주류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삼남매 중 첫째 아들은 국순당을 둘째 딸은 배혜정누룩도가, 셋째 아들은 배상면주가를 경영하고 있다.

배상면 회장은 회사 경영자 보다는 주류개발에 몰두해 왔다. 따라서 한 동문은 오늘날 국순당의 모체로 1970년에 설립된 한국미생물공업연구소 시절부터 실질적인 경영전반을 관리해 왔다. 사업 초기 시절, 한 동문이 서울과 공장이 있는 순천을 오가며 허술했던 회사 전반을 재정비해 흑자경영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땐 치마 한번 입어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서로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여자’이기보다는 악착같은 ‘경영인’이 돼야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술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실어놓은 트럭 앞에 가게 됐다. 그는 우연히 직원들이 자신을 속여 기존 재료의 정량보다 100개가 더 많은 500개의 재료를 트럭에 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사람들아 우리가 이래가지고 공장이 크게 되겠냐?”라며 그는 호통을 치며 직원들을 다그쳤다. 그 후부터 직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회사의 경영에 피해를 주기 보다는 회사를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함께 사업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한 동문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경영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람을 잘 다루어야 모든 것이 제대로 잘 되더라. 남편은 기술을 다루니까 나는 사람을 다루는 거야.” 이어 그는 생계가 힘든 직원들을 돕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직원들의 방세를 대신 지불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매섭게 직원들을 통솔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드럽게 그들을 포용했다.

한상은 동문은 순천과 서울을 오가며 회사의 기틀을 잡던 그 시절이 특히 힘겨웠다며 운을 띄웠다. 가족들이 내려왔다 다시 떠나는 날이면 그는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슬픔을 누릴 여유도 없이 한 동문은 경영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가 혼자 서울과 순천을 오가며 회사의 기틀을 세울 당시, 그의 자녀들은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그리고 고등학생이었다. “그 고생을 하면서도 아이들 공부는 시켜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죽을 힘을 다해 버텼지.” 그의 외롭고 험난했던 이러한 과정들이 오늘날 전통주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국순당을 이룩한 것이다.

비바람 속 길잡이 돼준 ‘가족’이라는 등대
한상은 동문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영을 하면서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유혹하는 손길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가족을 생각한다. 남편과 자식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도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한상은 동문은 건강이 좋지 않다. 평일에는 주로 병원을 다니거나 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건강을 관리하고 있다. 한 동문은 “비록 신체적인 건강은 좋지 않지만 정신적 평온이 나에게 큰 힘이 됐어”라며 “잘못한건 자신의 탓으로, 일이 잘 해결 될 때는 남에게 고마움을 돌리는 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단과 이야기를 나눈 한 동문은 81세라는 연세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정정함이 느껴졌다.

인터뷰를 끝내며 한 동문은 후배들에게 “내가 학교를 다녔을 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중요한 사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 같아. 거창하게 무엇인가를 계획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자신의 학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생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라고 조언했다. 또한 그는 “내가 이 자리에 앉게,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내게 인품과 인격을 만들어 준 것이 숙명여자대학교야”라며 우리 학교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 숙명은 동반자이자 스승인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과의 외로움에서 버텨내며 인생의 매순간 순간을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았다. 자성(慈晟) 한상은. ‘자성(慈晟)’은 그의 아들이 한상은 동문에게 지어 준 호(號)이다. 빛나는 어머니라는 뜻의 호는 그가 살아온 삶을 함축한다. 최선을 다해 하루 하루를 빛나게 살아가는 그의 인생관이 우리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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