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각박해진 세상이라지만 지난주는 유난히 잔인했던 일주일이었다. ‘근무태만 지적하는 상사를 살해 후 자살’ ‘보험금 노린 70대 저승사자’ ‘화이트데이, 부인이 남편 살해’ 등 제목만 봐도 소름 돋는 사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경악을 금치 못했던 사건은 유괴된 아이가 산 채로 유수지에 던져져 살해된 일이었다.


범인은 1억 3,000만 원의 빚을 지고 있던 20대 남성이었으며 큰돈을 쉽게 구하기 위해 납치를 택했다. 그리고 범행 3일 전 납치지역을 인천 연수구 송도동으로 정하고 대상을 물색했다. 이유는 ‘아파트 값이 비싼 송도동의 주민이면 돈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때문이다. 입에 담기조차 싫은 불쾌한 사건의 전말들을 뒤로 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범인이 갖고 있던 ‘편견’이다.


편견의 시작은 사회 혹은 개인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있다. 이것은 자신이 미리 접한 정보나 첫인상에 좌우되기 쉬운데, 한 번 정립되면 고정적이며 변화하기 어려워 막강한 힘을 갖는다. 때문에 본질의 것을 왜곡시키고 결국 본질은 거짓에서 시작되고 만다.


그것을 알기에 장애인, 혼혈아 등의 소수자들은 ‘편견을 벗고’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이 안에는 그들의 삶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 사회 속에 편견이 굳게 자리 잡고 있음을 뜻한다. 아직도 그들에게 사회의 눈은 냉대와 질시를 담은 눈초리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도 같다.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수를 능가할 40만이라는 수는 이제 외국인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그들을 보호할 변변찮은 제도나 법조차 형성돼있지 않다.


편견은 편견을 낳고, 그것은 집단화된다. 아마도 우린 소수자들 중 굉장한 능력 혹은 업적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를 특이한 경우로, 유별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 집단에서 어쩌다 한 번 나올 수 있는 인물로 말이다.


타인을 바라볼 때 한꺼풀만 벗기면 ‘그로서의 그’가 보일 테고, 눈을 감으면 ‘나와 같은 그’가 느껴진다는 것을 기억하자. 섣부른 일반화는 위험하다. 그러나 오늘도 길을 걸으며 지나치는 사람을 내 마음대로 상상하는 필자 역시 편견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을 아닐까.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