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역사

진화론은 넓은 의미로 생물의 진화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분야를 말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 사람들은 흙ㆍ물ㆍ바람ㆍ불이 모여 생명을 이룬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의 조상이 물고기 모양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흔히 이 설들을 진화관념의 효시로 여긴다.

18세기, 진화론에 불이 붙다
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는 진화사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모페르튀는 『사람 및 동물의 기원』(1745)에서 생물의 종(種)변화를 설명했으며, 뷔퐁은 『박물지』를 통해 생물은 환경의 영향, 특히 온도와 먹이가 직접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앞뒤 주장에 모순이 있어 ‘진화론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한다.


18세기 말에 들어서며 영국의 E.다윈은 『주노미아:Zoonomia』에서 생물의 욕구(欲求)가 생물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대를 이어감에 따라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체계화된 이론은 아니었지만, 라마르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체계적인 진화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라마르크는 무기물에서 자연발생(自然發生)한 원시적 생물이 발달해 복잡해진다는 전진적 발달설과 습성에 의해 획득형질이 유전됨으로써 발달한다는 설(용불용설用不用說)을 주장하게 된다. 또한, 그는 동물은 내부감각으로 생기는 욕구로 진화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라마르크의 학설은 당시 허무한 주장이라고 묵살되거나 배격되었다. 그 이유는 당시 비교해부학자ㆍ분류학자였던 창조론자 퀴비에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퀴비에는 과거의 몇몇 생물이 사라진 것은 인정했지만, 이는 대홍수나 천재지변으로 사라졌다(천재이변설)고 생각했다. 그 때마다 신이 새로운 생물을 창조해 빈자리를 채웠다고 주장했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창조론이 우세였다고 한다.


한편 진화론을 확립한 사람은 E.다윈의 손자인 C.H.다윈이다. 그는 ‘전진적 발달’을 제외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변이의 원인 중 한가지로 꼽았으며, 자연선택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다윈의 주장은 획득형질(獲得形質)의 유전이 문제가 돼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이에 바이스만은 다윈의 이론에서 용불용설을 부정하고 생식질의 연속설(1985)을 제창해 이를 ‘신다윈설’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 맞서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신라마르크설도 나오게 된다. 이 외에도 로마네스, 바그너 등은 지리적 또는 생리적인 격리에 의한 교잡의 방지가 없이는 생물의 진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격리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20세기, 과학발전으로 보강된 진화론
19세기 말이 가까워짐에 따라 다윈설의 결함이 차차 드러나고 진화론에 입각한 계통탐구의 어려움이 인식되면서 생물학이 실험생물학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1900년 멘델리즘의 재발견으로 진화론은 유전 연구분야에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는 ‘유전자는 불변이다’는 것이 정설이었고, 요한센은 순계설(1903)을 내세워 선택은 순계*의 분리에 이용될 뿐이며 환경에 의한 변이는 진화에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드 브리스는 달맞이꽃의 연구로 돌연변이설(1901)을 세웠는데 진화는 순계에서 발생한 돌연변이 때문이며, 자연선택은 별로 역할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로티는 교잡에 의하여 진화가 일어난다는 교잡설(1916)을 주장한 바 있다.


이렇게 20세기의 전반기는 진화론은 여러 가지 설에 회의를 품게 된다. 그렇지만 유전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돌연변이의 본질이 밝혀지고 생물학의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집적됨으로써 진화연구가 비약적으로 진행됐다. 그리하여 돌연변이ㆍ교잡ㆍ격리ㆍ자연선택 등을 진화의 요인으로 종합한 현대적 종합설 시대가 오게 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도브잔스키의 『유전학과 종의 기원』(1937)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1945년 이후에는 분자생물학이 발달함으로써 분자 수준에서 진화가 논의되고 있다. 


*순계 : 육종학상 자가수정에 의하여 유전적인 형질이 균일한 자손을 만드는 개체의 모임. 순종이라는 뜻을 가진다.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