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

돌아오는 2009년은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의 탄생 200주년이자 그의 저서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윈의 고향 영국을 비롯해, 전 세계는 학술대회, 전시회 등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1170호 학술부에서는 다윈과 진화론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다윈은 누구일까? 200년 전으로 거슬러 가보자.

 

운명의 항해 ‘비글호’

찰스 로버트 다윈(1809.2.12~1882.4 .19)은 영국의 슈롭셔에 위치한 슈루즈버리의 부유한 시골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시골을 좋아하고 시골의 생물들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였지만 진로 결정에 있어서는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의사가 되길 바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에든버러의 의대에 입학하지만, 결국 중퇴하고 케임브리지의 신학대학으로 가게된다. 신학대에 진학한 다윈은 22살까지 성경에 쓰인 ‘창조론’을 믿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은사의 권유로 세계의 경도를 측정하려는 영국의 군함 ‘비글호’에 오르게 된다.

비글호를 타고 4년 9개월 5일 간의 긴 탐사 여행을 하게 된 다윈은 남아메리카 해안ㆍ갈라파고스 같은 여러 섬들을 탐험하게 됐다. 탐사 기간 중 3년 정도를 남아메리카에서 머물렀다는 다윈은 가는 곳마다 지질학 탐사를 하고 그곳에 서식하는 다양한 동식물과 암석, 광물 표본 등을 수집하고 기록했다. 항해를 끝내고 귀국한 그는 조금씩 진화에 대한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귀국 후 다윈은 그 여행에서 겪은 경험을 정리하여 1839년 ‘비글호 항해기’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40년에는 항해 도중에 본 동물들을 기록한 ‘비글호 항해의 동물학’이라는 책도 출판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진화론에 대한 그의 견해가 확고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소심했던 다윈의 결정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생각은 확고해졌지만, 대세인 ‘창조론’에 맞서지는 못했다. 다윈보다 앞서 ‘용불용설’(1809년)을 발표한 라마르크도 몹시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소심했던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정리한 논문을 친한 친구들에게 보여줬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다윈은 후배 월러스가 보여준 논문을 보고 놀라게 된다. 자신의 자연선택설과 거의 똑같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평생을 연구한 진화론에 대한 합법적 선취권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절친한 친구인 라이엘과 후커가 다윈을 돕게 됐고, 런던의 린네학회에서 월러스와 공저(共著)형식으로 「종의 변종형성 경향과 자연선택에 의한 종과 변종의 영속에 대하여」라는 긴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월러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다윈의 이론은 이 날 빛을 보지도 못했을것이다. 1858년 7월 1일의 일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의 기원’은 이듬해인 1859년에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출간된다. 그러나 1860년 영국협회회의의 윌버포스 주교가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화형식에 처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생물학자이자 다윈의 친구 토마토 헉슬리는 주교와의 대결에서 승리해 진화론을 지켜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비글호의 선장 피츠로이는 충격을 받은 나머지 미쳐버렸고,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자신과 함께했던 항해기간에 다윈이 수집했던 것들이 ‘진화론’의 초석이 됐다는 점, 그리고 성직자의 길을 걷던 다윈을 망쳐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달이온’

출간 하루만에 매진이 됐다는 <종의 기원>. 영국에서 머나먼 한국 땅까지 어떻게 전해졌을까? 한국에 처음 진화론이 소개된 것은 일본과 중국을 통해서였다. 특히 서양에서 주로 논의되었던 ‘생물진화론’보다는 진화론을 인간 사회에 적용한‘사회진화론’이 먼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는 1884년 3월 8일자 ‘태서문학원류고’라는 글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처음 소개했다. 다윈을 ‘달이온(達爾溫)’이라는 이름으로, 진화론을 ‘순화설(醇化設)’로 표기하며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이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널리 전해지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한 것이다. 아래의 사진은 종의 기원이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된지 15년이나 흐른 1909년에 이상용이 쓴 ‘진화집설’에 소개된 진화론에 관련된 내용 중 일부다.

(해석) 다윈(達爾文, 영국 사람)이 <종원론(種源論:종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생물이 변천하는 원인은 모두 생존 경쟁, 우열과 승패의 법칙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승패의 계기는 자연적인 것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고, 인위적인 것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다. 자연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은 ‘자연도태’라고 이르고, 인위에서 비롯된 것은 ‘인사도태’라고 이르니, 도태가 그치지 않아 종자가 마침내 날마다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진화론은 여전히 ‘논쟁 중’

진화론은 15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론(論)’이라는 이름을 벗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의 내용들은 과학적 사실에 기초한 ‘사실’이 아닌, 자료를 바탕으로 추론해낸 개인의 ‘추측’이기 때문이다. 천충일(분자생물학 전공) 교수는 “진화론은 이미 생물학의 뼈대를 이루고 있어 진화론이 빠지면 생물학 전체가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 교수는 “추측은 추측에서 끝나야 하므로, ‘과학적’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몇몇 진화론자들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마치 과학적인 진실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기도 한다.

또한 진화론은 기초생물학에 기반을 두고 점검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는 진화론의 추측근거가 되는 자료, 즉 동물과 식물 등의 표본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하고 다른 과학적 사실들 또한 발견되기 때문이다. 천 교수는 “지금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진화론은 다윈이 처음 제창했던 진화론과는 다르다”며 “진화론이라는 학문은 계속 수정, 보완되고 있으므로 10년 뒤의 진화론 역시 지금과는 다른 내용일 것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진화론의 영원한 숙적, 창조론과의 대결은 어떨까. 다윈의 이론이 종교와 배치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종교의 설명으로만 해결됐던 ‘종은 어떻게 출연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과학적인 답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창조론 역시 추측의 영역이고, 두 이론 모두 근본이 되는 문서가 있다. 이러한 문서는 개개인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들면, 다윈의 이론을 접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 중 일부는 창시자를 부정하고 있다는 이유로 불쾌감을 나타냈으며, 아직까지도 현대판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반면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과학과 종교를 융합해, ‘우주와 생명이 자연 법칙을 따르지만 그러한 법칙을 창조한 것은 신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다윈은 생명의 최초 출현이나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주장한 바가 없다기 때문에 엄연히 말하자면, 창조론을 거스르는 이론은 아닌 셈이다. 천 교수는 “과학적인 결론을 내리거나 너무 맹신하지 않는다면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추측하는 것이기에 바람직하다”며 “이러한 논쟁은 과학의 장을 넓히는 길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다시 시작하는 ‘또 다른 다윈’

다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종의 기원』(1859) 이외에도 『비글호 항해기』(1839), 『인간의 유래』(1871) 등의 책을 집필했다. 그 중 다윈의 ‘4년 9개월 5일’에 걸친 여정, 『비글호 항해기』를 따라 길을 떠난 과학자가 있다. 바로 한국지질자원연구소의 권영인 박사다.

권 박사는 다윈 탄생 200주년과 종의 기원 출간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사비를 털어 ‘장보고호’를 제작, 177년 전 다윈이 밟았던 항로를 따라 400여 일간의 항해를 하게 됐다. 다윈은 박물학자로 동식물 관찰과 수집을 위해 비글호를 탔지만, 장보고호에 오른 권 박사는 환경과 자원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지난 10월 9일(목) 미국 아나폴리스 항을 시작으로 카리브 해와 남아메리카, 태평양을 건너 내년 12월 전남 여수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권 박사를 먼 바다로 내보낸 원동력은 단순한 호기가 아닐 것이다. 다윈은 중년 시절 은둔 생활을 했고, 오랜 항해로 지병까지 얻어 결국 1882년생을 마감하게 됐으나 자연 세계에 대한 그의 끝없는 호기심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400여 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장보고호에는 ‘또 다른 다윈’을 위한 호기심이 가득 실려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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