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1월 15일 원각사에서 공연된 이인직의 ‘은세계’를 시작으로 한국에 신연극의 시대가 열렸다. 이전에는 집 앞 마당에서 구성진 판소리가 흘러나왔으나 신연극이 들어온 후 옥내극장에서 창(唱)과 연기로 공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올해 11월 대한민국에 신연극의 꽃을 피운지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기, 대한민국 신연극의 꽃씨를 뿌린 삼인방 임성구, 이기세, 윤백남을 만나보자.



■ 국내 최초로 일본 신파극을 수용한 임성구
임성구는 어려서부터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이를 해보고자 하는 진취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청소년 시절, 일본인 극장에 신발지기로 취직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로 기존 우리나라의 공연방식과는 전혀 달랐던 일본 신파극이었다. 신파극은 1908년 을사늑약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서울에 거주하면서 들어왔는데, 이러한 일본 신파극을 처음 배우고 극단을 만들어 대한민국 땅에 처음으로 전파한 사람이 바로 임성구다.


그러나 한국 연극사에서 임성구의 신파극은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신파극은 레퍼토리가 항상 일정했으며 더구나 일본 공연을 답습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벌인 신파극 운동은 2년여 만에 전국적으로 위세를 떨쳤지만 1919년 3ㆍ1운동 이후 문화적으로 자각한 대중들의 외면 속에 쇠퇴했다. 결국 그는 1921년 지병이었던 폐결핵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비록 그의 연기, 연출, 시나리오가 대단치는 않았지만 그는 연출가이자 극단 경영자로서 이 땅에 연극이라는 분야를 개척한 선구자였으며 신파극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 개화기에 대중연극을 개척한 이기세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기세는 어린 시절부터 감수성이 예민해 문화ㆍ예술에 관심을 갖고 일본 교토로 유학을 떠났다. 1910년에 돌아온 그는 ‘개성좌’라는 극장을 만들어 한철순, 안광익 등과 극단 ‘유일단’을 조직했다. 그는 임성구와 달리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연극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으며 연극을 이용해 대중들을 계몽하고자 했다. 그는 처음으로 지방순회공연에 나서는데, 이상한 옷을 입은 배우들을 강도단으로 오해해 경찰서에 끌려가는 등 신연극을 처음 접하는 지방민들과의 해프닝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극단활동은 매우 영세한 사업이었으므로 이기세 또한 가난을 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연극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윤백남을 만나 ‘예성좌’라는 극단을 다시 조직했다. 그는 최초로 단원들에게 대본, 연출 등의 일을 나누며 극단에서 처음으로 분담시스템을 도입했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어려움은 계속됐지만 그는 극단 ‘예술협회’를 조직한다. 그는 일본 번역극이 아닌 조선 창작극을 공연하고자 했으며 이는 신연극운동의 첫발인 셈이었다. 이어 조선음률협회를 창립해 우리 고유의 전통음악을 살리기 위한 부흥운동을 일으키려고 하는 등 쉼 없이 우리나라의 문화산업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이기세는 인멸되어 가는 우리의 전통 예술을 보존 및 보급하는 역할을 하다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 신(新)문화 운동을 일으킨 윤백남
1888년에 태어난 윤백남은 어려서부터 성적이 뛰어났고 일본어에 능통해 열여섯 살이 되던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는 본래 정치학과에 진학했으나 연극과 영화에 관심이 많아 예술 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교사와 강사로 뛰며 생활을 꾸리던 그는 친구들에게 자금을 제공받아 극단 ‘문수성’을 조직한다. 그는 1년여 간 열심히 공연활동을 벌이지만 여전히 재정난을 극복하긴 힘들었다. 마침 이기세와 함께 ‘예성좌’를 출범시켜 톨스토이의 소설 「카츄사」등 근대극을 선보였다. 또한 3ㆍ1운동 이후 동아일보에 연극론 「연극과 사회」를 연재하면서 우리 연극의 문제점이었던 연극인, 재정, 기술의 부재를 지적하곤 했다. 얼마 후 예술협회에서 그는 직접 쓴 희곡 「국경」과 「운명」을 선보이며 신극운동과 함께 지속적으로 연극의 발전에 앞장섰다.


당시 신문화인들은 서구 문화를 숭상하고 우리 전통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짙었는데 윤백남은 우리 문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서구의 근대극과 공존해야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신파극에서 영화로, 다시 신극운동으로 전환하며 폭넓은 활동을 했다. 뿐만 아니라 역사가, 언론인, 교육자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신문화 개척 및 정착 앞장선 인물이었다.


연극이야 말로 당시의 삶과 사회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예술이다. 이러한 극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했던 이들 삼인방 있었기에 현재 우리나라의 연극문화가 정착할 수 있었다. 100년이라는 결코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현재 우리나라 연극들이 해외로 진출하고 덩달이 관객들의 수준도 높아졌다. 100년이라는 세월이 정착한 오늘을 우리나라 연극의 새로운 도약점으로 삼아야할 때다.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