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만덕

조선 1795년 정조 시대, 최악의 흉년으로 전국이 온통 떠들썩했다. 특히 제주도는 만 여명 이상의 백성이 굶어 죽어서 다른 지역보다 그 피해의 규모가 컸다. 제주도의 백성들은 굶주림을 참다못해 시체를 식량삼거나 자식을 버리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때 자신의 전 재산을 풀어 굶주린 이들을 구제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조선의 여성 상인 ‘김만덕’이다.

당시 조선에는 성리학 사상으로 인해 남성 중심의 사상체계가 팽배해 있었다. 성리학 중심 사회의 여성들에게는 가정 내에서 ‘순종’과 ‘공경’의 여성상이 요구됐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여성이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김만덕은 어떻게 여성 상인으로서 흉년을 구제할 만큼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까?

김만덕은 양인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부모를 여읜 후에는 기생이 되었다. 그는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제주도 무근성 지방에서 유명한 기녀로 통했다. 그러나 당시 기생이라는 직업은 천민의 신분이었기에 스무 살 무렵, 과감히 기생의 삶을 버리고 관가에 읍소해 어렵게 양인 신분을 되찾게 된다.

그 후 김만덕은 포구에 행상을 차려 상인들과 거래를 시작한다. 이곳에서 김만덕은 각지의 상품 집산지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매매를 주선하고, 이와 관련해 창고업ㆍ화물수송업ㆍ금융업을 겸하는 중간상인의 역할을 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과거 기생시절의 경험으로 육지에서 수요가 높은 특산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상은 나날이 번창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육지와의 직거래를 통해 시세 차익을 남기거나 특산물에 대한 주문 생산제를 도입해 손해를 최소화 시켰다. 이처럼 김만덕은 그 당시에는 찾아보기 힘든 탁월한 장사수완을 발휘해 조선 상권에 영향력있는 거상으로 떠올랐다.

그는 제주도 백성들이 흉년에 의해 아사 위기에 처했을 때, 그동안 자신이 축적해 온 재산을 사회에 모두 환원 시켜 백성을 구하는 민족애를 발휘했다. 이에 정조는 만덕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그의 소원을 물었다. 김만덕의 소원은 ‘한양에 가서 왕을 만나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 이었다. 당시 제주도민은 관가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만덕은 정조의 승낙을 얻어 육지로 나올 수 있었고, 평민 여성 최초로 정조를 알현한 후 금강산을 유람하는 행운을 얻게 됐다.

재색을 겸비한 기생에서 제주도 최고의 거상으로 이름을 날린 김만덕, 그는 당시의 계급과 성 역할을 뛰어넘은 조선 최고의 여성 상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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