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순간


송호고등학교 정근애


"고흐는 양성애자였어."

양이 말했다. 헐렁한 베이지색 티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입은 한 숫양이, 내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말했다. 양은 '메에' 우는 대신, 아직 따스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 앞에 놓인 커피는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고흐는 양성애자였지. 그가 어떤 창녀에게 목을 매었으면서도 그의 남동생이나 고갱에게 병적일 정도로 집착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어. 하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지금, 온갖 비난을 다 쏟아 붓고 있을까? 어떄, 너도 고흐를 좋아하잖아?"

그 양은 전에 나와 고흐의 작품이 전시된 미술관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분명 그에게 고흐의 삶이 멋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때 이 양은 이런 후줄근한 차림이 아니라, 깔끔한 세미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또 삼켰다. 커피가 목 뒤로 넘어갈 때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는 그의 목젖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몽골 유목민들의 양을 잡은 방법을 떠올렸다. 그들은 양을 잡을 때, 절대로 두들겨 패거나 크고 날카로운 칼로 무자비하게 찔러 죽이지 않는다. 대신, 양을 안심시킨다. 어떠한 의심도 가지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고 쓰다듬다가, 어느 순간 정말 말도 안되게 작은 칼로 양의 목 어느 한 부분을 찌르는 것이다. 그리고 간단하게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양의 숨통을 뜯어낸다.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어떤 순간도 없고, 피도 거의 흘리지 않는다. 양은 조용히 무릎을 꿇고 쓰러져 그대로 죽는다. 그럼 그제서야 유목민들은 죽은 양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들어내고 고기를 썬다. 이 역시 어딘가 매우 평화로운 풍경이어서, 무슨 의식의 한 종류로 보일 정도라고 한다.

나는 이 방법이 마음에 들었다. 피가 튀기고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작은 칼을 생각했다. 나는 양을 죽이러 왔다.

양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달칵, 작은 소리를 냈다. 그의 희고 긴 손가락이 보였다. 그가 그 손가락으로 나의 손을 따스히 잡아줄 때, 나는 어떠한 일종의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그 손가락으로 내 머릿결과 얼굴을 쓰다듬어주곤 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그 남자'의 머릿결과 얼굴도 쓰다듬었다. 우연히 두 숫양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내 속에 항상 작은 칼을 감추어두고 다녔다. 언젠가 두 양을 잡아 버릴 생각을 하며, 아니 최소한 예전엔 나의 양이라고 생각했던 이 양이라도 잡아버리기 위해서-어떻게, 숫양끼리?-.

내 커피도 처음 테이블에 놓여졌을 땐 얼마간 따뜻했다. 그러나 커피는 금방 식었다. 그것을 별로 긴 순간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의 하얀 손이 도리어 내 숨통을 잡아 뜯는다 해도 전혀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은 조금 아플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 전에 먼저 내가 그의 숨통을 뜯어버리려는 것 뿐이다.

이제, 찌를 순간이 온 것일까.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어느새 그와 앉아있던 카페 대신 몽골의 넓은 초원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내 품엔 흰 양 한 마리가 안겨 있었다. 많은 유목민들이 나를 둘러 싸고, 어서 양의 가죽과 살코기와 내장을 분리하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나의 칼을 집어들었다. 그 때, 양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양의 까만 눈 속에서, 나는 한 송이 노란 해바라기를 발견했다. 양과 나는 오랫동안 눈을 마주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나의 손이 떨렸다.

"넌 이제 고흐도 싫어졌니? 그의 해바라기를 어떤 그림들 보다 아름답다고 말했던 넌……."

양은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메에' 작게 울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그 넗은 초원 가득히 노란 해바라기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유목민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와 내 품 안에서 목을 나에게 완전히 맡기고 있는 양만이, 온통 노란색으로 뒤덮인 해바라기 밭 한가운데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칼을 떨어뜨리고, 그 채로 한동안 계속 서 있었다.

그것은 아주 긴 순간이었다. 나는 재빠르게 양을 죽일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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