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달이 뜬 풍경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여자고등학교  엄 지 희

  

학원 수업이 끝났다. 나는 어깨에 가방을 둘어 맸다. 문제집이 가득 들은 가방은 묵직하게 내 몸을 짓눌렀다. 제대로 수업을 들은 것도 아닌데 괜히 피곤했다. 나는 강의실에서 나와 계단쪽으로 걸어갔다. 학원 창밖에서 짙은 노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나는 잠깐 멈춰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장난감처럼 작아진 건문들 위호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다.

휭, 찬바람이 불었다. 겨울은 끝나가고 있는데 아직 바람이 시렸다. 나는 학원 건문 앞에 서서 목도리를 코까지 끌어 올렸다. 그 때, 양비즘 나무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벙거지 모자에 갈색 코트를 입은 그 사람은 내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여긴 어쩐 일이야?”

할아버지가 슬쩍 미소지었다.

“이 할애비가 우리 손주 마중 나왔지.”

할아버지는 서둘러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내 손에 그 장갑을 끼워주려 했다.나는 손을 뒤로 뺐다.

“됐어.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껴!”

그러나 할아버지는 내 말은 듣지 않고 억지로 내손에 장갑을 끼웠다. 부드러운 털장갑 덕분에 손끝이 따뜻해졌다. 괜히 미안해져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라? 나는 깜짝 놀라 작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신발이 짝째기야!”

그랬다. 할아버지 신발 한쪽은 까만색 낡은 구두, 다른 한쪽은 까만 운동화였떤 것이다. 내 말에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 본 할아버지가 작게 웃었다.

“정신없이 나오느라 잘못 신은 모양이구나. 할애비 정신이 잠깐 어떻게 됐나보다. 신경 쓰지 말고 어서가자.”

벙쩌 있는 나를 두고 할아버지가 앞서 설었다. ㄱ나는 할아버지 신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얼른 할아버지 옆으로 뛰어가 바람이 부는 쪽에 섰다. 할아버지께 바람막이라도 되어드려야 할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며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바람이 속에서 눈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는 내게 있어 부모나 다름없었다.어릴 적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 때문에 나는 늘 혼자였다. 내 유년시절 기억의 절반에는 부모님이 없었다. 대신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 유년시절을 쓸쓸하게 만들지 않았다.

조금 강한 바람이 할아버지와 나를 덥쳤다.

“아이구.”

할아버지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의 모자가 바람에게 빼앗겨 저만치 날아가 있었다. 나는 되돌아가 모자를 주워 왔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바람이 매섭구나.”

할아버지는 모자를 받아들며 말했다. 노을빛이 그대로 비춰 들어와 할아버지의 얼굴을 적셨다. 노을에 젖은 할아버지의 얼굴이 유난히도 늙어보였다. 어디선가 군고구마 냄새가 쓸쓸하게 풍겨졌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졌다.

가로등을 사이에 둔 갈래길이 나타났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발을 멈췄다.

“왜 그래 할아버지?”

멍하니 두 길을 둘러보는 할아버지

“우리 집이 어느 쪽이냐……?”

덜컥. 무언가가 무너질 듯한 소리를 냈다. 담벼락에 붙은 광고 전단지가 바람에 펄럭이며 시끄러운 소음을 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 길은 할아버지와 내가 10년이 넘게 걸어 다니던 곳이었다.

불안한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걸까. 할아버지는 다시 허허 웃었다.

“맞다. 이쪽이었지. 늙으니깐 건망증이 심해지는 구나. 허허.”

할아버지는 오른쪽으로 몸을 들었다. 그러나 별로 확신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왠지 불안해졌다 내 옆에서 터덜터덜 걷는 할아버지가 왠지 작아보였다. 예전에는 나보다 훨씬 커보였는데. 내가 커진 걸까, 할아버지가 작아진 걸까.

“눈이 오려는 모양이구나.”

할아버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랬다. 어둠이 차오른 하늘은 조금 흐렸다. 겨울이 끝나가는 마당에 눈이라니. 골목 저 끝에 양버즘나무의 마른 잎이 바닥을 긁으며 기어갔다. 내 마음도 긁었다. 보안등이 매달린 전봇대가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전봇대를 가리키며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저거 기억나?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쯤에 여기서 세발자전거 타다가 저 전봇대에 박았었잖아."

 나는 할아버지에게 눈을 돌렸다. 가슴이 작게 뛰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 때 동네가 떠나가라 하며 울어댔었지 아마. 허허."

 나는 안심이 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나 혼자 바보 같은 생각을 한 거였어. 괜찮아.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짝짝이인 할아버지의 신발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멀리, 불이 켜지지 않는 가로등 옆, 우리 집의 주황색 대문이 보였다. 1년 내내 핀다는 도르트문트 넝쿨장미가 담벼락 너머로 메마른 얼굴을 내밀었다. 집 앞에 서 있는 목력 나무가 어서 오라며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너무 추워서 코끝이 얼얼했던 나는 얼른 집 앞으로 달려가 대문을 열었다. 끼기긱.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렸다.

"할아버지. 춥다, 빨리 들어가자."

 나는 문 앞에 서서 할아버지가 오길 기다렸다. 해가 완전히 떨어져서 주위가 깜깜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할아버지의 얼굴은 선명하게 보였다. 할아버지는,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안해진 나는 조심스레 할아버지를 불렀다.

"할아버지…."

"여기가… 어디냐…?"

 할아버지가 작게 물었다. 나는 대문의 금속 문고리를 꽉 잡았다. 차가웠다.

"어디냐니, 우리 집이잖아."

 목소리가 떨렸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생각에 나는 불안해졌다.

"우리 집… 이라고…?"

 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본다. 장난치는 거지? 라고 물어보려 했는데,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 때, 할아버지가 퍼뜩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집이였지. 그래."

 할아버지가 나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할아버지 뒤를 따라 들어갔다.

"찬바람이 할아비 정신을 흔들어놔서 그래."

 할아버지는 변명하듯 내게 그렇게 말하며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마당 담벼락 아래, 텅 빈 화분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미처 날아가지 못한 마른 잎들이 마당 한 켠에 쌓여 있었다.

무언가 얼굴에 떨어졌다. 눈이었다. 올 겨울의 마지막 눈. 담 너머 목력나무에는 꽃봉오리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이번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겨울일지도 모른다. 아마, 할아버지에게 다시는 겨울이 오지 않을 것이다. 눈가에 눈이 내려앉았다. 나는 한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문득, 손에 낀 할아버지의 장감에서 누룩냄새가 났다. 할아버지의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에 가슴이 그들먹해졌다.

하늘을 올라다봤다. 축축한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얼굴에 떨어지는 그 눈은 차갑고, 또 시렸다. 밤하늘에 파스텔로 칠해 놓은 듯 하얗게 흐려진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 쓸쓸한 풍경에 내 마음도 진눈깨비처럼 축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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