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 축제를 포기하고 사회에 저항하는 모습……. 이것은 우리 할머니, 어머니가 20살 꽃다운 시절에 즐겼던 우리 학교 축제의 모습이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옛 축제의 모습을 우리 학교 출신 교수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들어봤다. 교수들이 들려주는 40년 전 축제의 현장 속으로 떠나보자.


60년대, ‘청파축전’이라 불리던 우리 학교 축제는 4월 20일 개교기념식을 시작으로 5월 초까지 약 20일동안 이어졌다. 우리 학교 성낙희(국어국문학 전공, 68졸) 교수는 “축제 기간 중에 각 학과와 동아리가 준비한 모든 행사가 이뤄졌다.”며 “학과에서는 연사를 초청해 특별 강연을 하는가하면, 총학생회에서 축제만을 위한 문학의 밤을 열어 학생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 학교 아시아여성연구소에서 여류문학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교내 연구소에서도 축제 준비로 분주했다. 60년대의 축제는 공연 위주로 이뤄지는 지금의 축제와는 달리 학구적인 분위기가 짙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우리 학교 축제는 ‘청파축제’로 이름을 바꾼 뒤, 개교기념일 즈음 금, 토요일 양일간 진행됐다. 유미숙(가정아동복지학 전공, 78졸) 교수는 70년대 우리 학교 축제를 ‘교내에 남학생이 유난히 많던 날’이라고 떠올렸다. 유 교수는 평소에는 남학생의 출입이 금지됐지만 축제만큼은 예외였다며 “호기심에 몰려온 남학생들 때문에 축제 기간에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많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남학생들의 넘치는 관심 속에서 개최된 ‘전통 축제’는 우리 학교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당시에는 잔디로 뒤덮여있던 지금의 백주년 기념관 자리에서 3, 4학년 학우들이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널뛰기, 제기차기 등의 전통놀이를 즐겼다. 유 교수는 “전통 축제 중에는 부모님 혹은 남자파트너를 초청해 함께 춤을 추는 시간이 있었다.”며 “결혼 적령기가 지금보다 이르던 그 시절, 축제에서 만난 파트너와 결혼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70년대 축제는 졸업 다음으로 화려하고 큰 행사였다.


화려했던 우리 학교 축제는 80년대 독재정권으로 인해 침체기를 겪어야만 했다. 우리 학교 문금현(국어국문학 전공, 85졸) 교수는 학생운동이 성행했던 당시를 떠올리며 “지금처럼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축제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대강당에서는 각 학과에서 준비한 학술 세미나가 열렸고, 원형극장에서는 학우들이 포크댄스를 추며 축제를 즐겼다. 그러던 중 학생들의 운동 소리,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축제가 중단됐다. 문 교수는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학생운동 참여자로 잡혀갈까봐 학생들 모두가 긴장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계속되자 83년에는 우리 학교 학우들이 공식적으로 축제를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혼란스럽고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 축제는 ‘대동제’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고 90년대에 이르러서는 현재와 비슷한 축제 체계가 형성됐다. 다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무대를 따로 설치하지 않고 원형극장을 이용한 프로그램이 많았다. 고유선(체육교육학 전공, 93졸) 교수는 당시 축제 때 학우들이 직접 준비한 많은 프로그램들을 떠올리며 “특히 한 학생이 놀이기구 위에 앉고 다른 학생이 공을 던져 다트를 맞추면 앉아있는 사람이 아래로 떨어지는 놀이기구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고 교수는 90년대 축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방범 섰던 일’을 꼽았다. “저녁 무렵 축제 열기에 도취된 대학생들이 일으키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학우들이 직접 저녁 10시부터 방범을 섰다.”며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말했다. 이처럼 90년대 숙명인들은 각종 놀이기구 설치부터 축제 후 방범까지 모든 축제를 스스로 이끌었다.


사회와 문화가 변화함에 따라 대학 축제의 모습도 조금씩 변하면서, 대학 축제는 역사의 변화와 함께 했다. 지난 주 뜨거운 열기 속에 막을 내린 우리 학교 축제는 현재 숙명인들에겐 즐거웠던 추억으로, 훗날 누군가에겐 사회와 문화가 고스란히 반영된 역사로 남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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