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행위예술가 정강자 씨 인터뷰

 

행위예술가 정강자. 이 말 앞에는 ‘최초’라는 타이틀이 늘 따라다닌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행위예술을 선보인 대한민국 퍼포먼스 제1세대이기 때문이다. 식상함과 답습을 거부하는 그는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젊은 청년의 패기를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에게 퍼포먼스 그리고 예술 이야기를 들어봤다.


저항의 몸짓에서 현실 반영의 예술까지


행위예술, 전위예술이라고도 불리는 퍼포먼스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행해진 것은 1968년, 정강자 씨가 직접 참여한 <투명풍선과 누드>를 통해서이다.


짧은 반바지와 머플러만 걸친 여인의 몸에 관람객들이 투명 풍선을 불어 부착한다. 시간이 지나 관람객들이 그의 몸에 부착된 풍선을 터트리고, 터져버린 풍선 뒤로 여인의 신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진①)


정강자 씨의 몸에 부착됐던 풍선은 당시 사회 속에 만연돼 있던 여성의 억압을 상징한다. 이어 풍선을 터트리는 행위는 여성의 해방과 자유를 상징하는 메시지다. “이 작품은 각종 억압과 규제가 팽배하던 1970년대 사회 상황에 저항하고자 기획됐어요. 그 때의 퍼포먼스들은 답답한 사회를 향한 ‘저항의 몸짓’이었죠.”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퍼포먼스는 그저 퇴폐적인 하나의 사건으로 취급됐다. “우리가 70년대에 선보인 행위예술은 해픈(Happen), 즉 사건이었기 때문에 해프닝이라고 불리며 예술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지금의 행위예술은 퍼포먼스라는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아, 언제든 다시 연출될 수 있는 공연물로 자리 잡았지요.”
1970년대의 퍼포먼스가 저항이었다면 지금의 퍼포먼스는 ‘현실 반영’이다. “요새는 뭐 저항할게 있나요. 요즘 퍼포먼스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해요. 그래서 그런지 대중들과 많이 친숙해지고 있고, 오히려 이젠 퍼포먼스를 해달라고 찾아와요.” 그가 말한 현재의 퍼포먼스 중 하나로 2003년 3월 1일 종로 한복판에서 행해진 민영환 동상 이전 기념 퍼포먼스 <레퀴엠1919>를 들 수 있다.


유관순 복장을 한 20명의 학생들이 가로 13m, 세로 10m의 흰 천을 들고 북소리에 맞춰 행진한다. 빨강, 파랑 페인트로 온 몸이 뒤범벅된 두 명의 학생들이 흰 천 아래에서 태극무늬를 그린다. 행진이 멈추자, 온 몸에 검은 먹물을 묻힌 학생들이 건곤감리를 그린다. 마지막으로 민영환의 동상이 세워지면서 유관순 복장을 한 학생이 한껏 고조된 목소리로 민영환의 유서를 읽는다. (사진②)


정강자 씨는 그날을 떠올리며 ‘최고의 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민영환 유서를 읽은 학생은 감정이 격해져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또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고 감동했다는 얘기를 해줘서 기분이 좋았답니다.” 이렇게 멋진 퍼포먼스는 한 번 공연되면 그 자리에서 소멸되고 만다. 이에 대해 아쉬움은 없을까? “퍼포먼스는 공연하는 즉시 사라져 매 순간 공연에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점이 매력이에요. 요즘에는 공연을 촬영해 보관하기 때문에 아쉬움은 덜해요.”



어떻게 표현하냐고? 나만의 언어로!



정강자 씨에게 예술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또 다른 언어이다. “인물, 정물 등 ‘무엇(what)’을 표현하느냐보다 ‘어떻게(How)’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퍼포먼스라는 새로운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정강자 씨가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예전에는 작품을 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떠오른 영감을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하면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제가 쓰고자 했던 방법을 다 쓰고 있어 좌절했거든요. 어떻게(How)의 의미를 깨닫고 나만의 표현 방법을 찾기까지 무척 힘들었어요.” 그는 지금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가는 드물다고 말한다. 그만큼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고민하며 보낸 정강자 씨의 40년이 더욱 값지게 보였다.


자신을 표현하는 정강자 씨의 또 다른 언어, 퍼포먼스는 하나의 예술 분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중들은 음악, 미술과 달리 퍼포먼스에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대중들이 다가가기엔 퍼포먼스가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퍼포먼스가 어렵나요? 그럼 이해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어떻게 모든 예술을 이해해요. 그냥 작품을 보고 ‘좋다’ ‘싫다’ 정도만 느껴도 돼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예술가가 전하고 싶은 바를 알고 싶으면 그 때 생각하고 공부하면 돼요.” 우리는 예술을 특정 사람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며 어려운 것으로 단정지은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해 그는 예술이 어려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기피하다보니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퍼포먼스의 매력이기도 해요. 쉽게 생각하자고!”



퍼포먼스의 미래, 창조를 꿈꾸다



과거는 저항, 현대는 현실 반영, 그렇다면 앞으로의 퍼포먼스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1970년대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 장르의 벽은 무너졌고, 최근에는 디지털 영상을 이용한 예술분야가 나타났어요. 미래의 퍼포먼스는 지금과는 다르게, 더 새롭게 창조돼야 해요.”라고 말했다. 이어 “요즘 사람들은 늘 보던 것, 늘 듣던 것만 좋아해요. 그런데 예술이 왜 똑같아야하죠?”라고 되묻는 그의 사전에 답습과 식상함은 없다. 기존의 질서를 뒤엎는 새로운 것, 즉 창조를 기반으로 한 예술이 바로 정강자 씨가 생각하는 예술이다. 

또한 그는 창의성을 끌어내지 못하는 우리 주변 환경에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마다 작품이 될 수 있어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 속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거든요. 그래서 학생들이 활발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현재 활동 중인 예술가들이 도와줘야하는데, 아직도 그렇지 못해요.” 재능 있는 사람을 발굴하고 세계적인 예술가로 키워주는 것, 그것이 예술 발전을 위한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조금 쉬고 싶기도 하련만, 정강자 씨는 5년 이내 대규모 전시회를 열 예정이라고 한다. 그 전시회는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는 회고전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움으로 가득 찬 전시회이다. 그는 “사람이 미래를 봐야지 왜 과거를 돌아보나요. 미래를 바라보며 또 다시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죠.”라고 말했다. “새로운 퍼포먼스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에요. 퍼포먼스 도중 쓰러졌는데 일어나지 않는거죠. 멋지지 않나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듯하다.
행위예술가 정강자 씨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곳 www.kangja.net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