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 해결 실마리 찾아 떠난 ‘평화의 길(Peace Road)’ 6박 7일 대장정

 ‘위안부 할머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마 여러분들은 TV 뉴스 자료화면에 등장해 땅을 치고 통곡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왜 몇 년 동안이나 그 할머니들의 모습이 TV 화면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하는 물음, 말입니다.
지난 2월 16일, 한국,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에서 온 40여 명의 학생들이 경기도 광주시의 어느 외진 마을에 모였습니다. 자신과는 거리가 먼, 혹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는 그 할머니들이 어딘가를 향해 아직도 울부짖는 이유를,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함께 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이 걸었던 일주일간의 ‘평화의 길’(피스로드, Peace Road)여정에 함께 따라나서 봅시다. -편집자 주

 


첫째날. ‘평화의 길’에 오르다

서울에서 지하철 두 번, 버스 두 번을 갈아타고서야 ‘피스로드’ 워크샵 장소인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설 연휴에 돌아가신 지돌이 할머니를 추모하고자 세워놓은 일종의 비석이었다. 향년 85세로 유명을 달리하신 지돌이 할머니를 제외하고 지금 이곳에 계시는 할머니는 8분, 전국에 108분. 그나마도 남아계신 분들이 다들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미리 듣고 온 나는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졌다.


일주일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오리엔테이션 행사가 시작됐다. 나눔의 집 ‘일본군‘위안부’역사관‘의 유일한 일본인 연구원이자 이 워크샵의 총 책임자인 무라야마 잇페이씨가 워크샵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피스로드(Peace Road)’는 여러 국가의 학생들이 모여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워크샵으로, 2002년에 처음 시작해 매년 2월과 8월 개최해왔다고 한다. 12회를 맞은 이번 ‘피스로드’에는 한국,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등 총 4개국, 40여 명(스텝 포함 5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했다. 이들 중에는 이번이 처음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행사 소개와 아울러 앞으로 있을 일주일 동안의 일정도 소개됐다. 총 다섯 번의 토론과 ‘위안부’역사박물관 탐방, 피해자 할머니들과의 교류, 수요시위 집회 참가, 관련 기관 방문 및 결과 발표 등이었다.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모두 어렵거나 낯설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됐다.


오리엔테이션과 저녁식사가 끝나고 드디어 첫 토론이 시작됐다. 이날 토론 주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특히 일본

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 궁금했던 터라 일본 참가자와 통역 스텝을 번갈아 바라보며 주의 깊게 들었다.<사진1>


일본에서 대학 졸업을 앞둔 상가 나츠미 씨(24)는 “학교 세미나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게 됐다. 일본 교과서에는 이에 대해 고작 한 줄 밖에 나와 있지 않다. 일본에서는 찬반 의견이 분분해 솔직히 어느 것이 옳은지도 잘 모르겠고, 실제로도 일본군‘위안부’가 존재했었다는 것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한 역사에 대해 나 스스로 제대로 아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츠즈미 신타로 씨(24)는 “일본에서 우연히 인터넷 만화 <다시 태어나 꽃으로>*를 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를 말했다. 그 외에도 전쟁, 평화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왔다거나,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 위안부 문제로 관심 영역을 넓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둘째날. ‘위안부’ 역사를 배우다


첫날 토론에서 나온 이야기처럼 위안부 문제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사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 중ㆍ고등학교 때 교과서를 통해 배운 내용이 미진하기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위안부’역사관 견학은 피스로드의 일주일 일정 중에서도 중요한 코스였다.


우리는 각 전시장을 돌 때마다 잇페이씨의 설명을 통해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새롭게 알게 됐다.**
첫 번째, ‘위안부’라는 명칭의 의미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제 시대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돼 강제로 반복해서 성폭행 당한 여성들을 말한다. 한국에서는 이 ‘위안부’를 정신대란 말과 함께 쓰는 경우가 많지만 정신대는 일반적인 노동력을 동원당한 여성을 지칭하는 말이므로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던 ‘종군위안부’라는 말 역시 올바른 표현이 아니라고 한다. ‘종군’이라는 말을 풀어 쓰면 ‘군대에 따라갔다’는 뜻이 되므로 스스로의 의지가 반영돼있는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는 ‘성노예’다. 그러나 이 말을 사용하면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무거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실은 옳은 표현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없이 ‘성노예’ 대신 ‘위안부’를 대체어 격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서 보듯, 위안부라는 단어에 ‘’가 붙은 이유도 이러한 맥락과 비슷하다.


두 번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전쟁 중에 들렀던 중국 대만, 필리핀, 타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지역마다 위안소를 뒀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자국인 일본에도 위안소를 둬, 실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을지 정확하게 수치화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이런 내용 외에도 우리는 역사관 견학을 통해 많은 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에 의해 공개된 각종 위안부의 존재를 증명하는 역사적 자료, 여러 자료가 있음에도 위안부 존재를 부인하는 일본 정부 관련 책임자들의 망언록. 그리고 할머니들의 증언을 토대로 군위안소의 형태를 재현한 방<사진2>, 피해자 할머니들의 슬픈 과거를 표현한 그림 등은 우리가 꼭 알아야만 하는 역사이고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었다.


일본군‘위안부’역사관 견학을 하며 나는 다른 박물관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특별함을 발견했다. 이곳의 자료들은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사람의 증언이고, 물품이라는 것이었다. 위안부 역사를 생각할 때 막연히 ‘과거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박물관 견학을 통해, 그리고 강일출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우리는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살아있는 역사임을 알 수 있었다.

“군복 입은 사람이랑 칼을 찬 일본인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때 끌려가면서 머리를 맞았는데 그 때 맞은 데가 아직도 아파……. 15살에 이런 경험을 한다면 상처가 있겠나, 없겠나?” “왜 일본사람은 왜 과거 문제를 질질 끌고 가는 건지. 가슴 아픈 적이 많아.” 강 할머니는 끌려가던 시절의 기억을 이야기 하면서 가끔 가슴을 치며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새 정부의 과거사 대응 태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눈물을 닦고 “위안부 할머니 문제는 과거사 문제라고 하고, 국가 원수 격인 사람이 과거사를 모른다 말하면 어떻게 하는 건가.”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사진3>

 
강 할머니처럼 모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증언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특히 성적인 부분에 있어 아픈 상처를 들춰내는 것은 사실 너무도 어려운 일이고, 말하기 싫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 할머니는 “제대로 된 사과를 받기 전까지는 죽지 못할 것”이라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피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강 할머니의 그런 용기 있는 증언에 우리들은 있는 힘껏 박수를 보냈다.

다음 호(1152)에 계속...

 


* 『다시 태어나 꽃으로』 : 만화가 권태성씨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나눔의 집을 통해 얻은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그린 작품. 1920년대 ‘연이’라는 조선 소녀가 일본군에 끌려가면서 겪는 참상을 그렸다. 『전쟁과 성-한국에서 ‘위안부’와 마주보다 (戰爭と性-韓國で ‘慰安婦’ と向き合う)』라는 제목으로 일본에 먼저 알려졌다. 한국어본은 지난 달 출간됐다.

** 일본군‘위안부’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할머니 군‘위안부’가 뭐예요?』 한국 정신대 연구소 지음, 한겨레 신문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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