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스토리텔링, 그 친숙한 특별함
디지털과 문화산업이 여는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지평
21세기 스토리텔링의 밑바탕을 지탱하는 것은 인문학

죽은 딸의 핸드폰에 전화를 거는 중년 남자. 이 남자는 음성사서함에 녹음된 딸의 목소리를 들으며 딸을 그리워한다.
최근 ‘전할 수 없는 마음까지 전한다’는 카피로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한 통신회사의 광고 내용이다. 광고를 접한 이소라(경제 06) 학우는 “줄거리가 있는 기업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그 기업의 이미지가 전보다 긍정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제품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제품을 둘러싼 이야기를 보여줌으로써 소비자의 호감을 높이는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숨어있다. 그런가하면, 지루하고 딱딱하게 여겨지는 경제ㆍ경영, 자기계발, 재테크에 스토리텔링 기법을 적용한 책이 인기를 끌며, 스토리텔링이 소설 외의 책에도 중요한 서술 기법으로 떠올랐다.

스토리(Story)는 서사학자들 사이에서 ‘허구로 구조화되기 전의 전체 줄거리’란 의미로 논의돼왔다. 이 말에 텔링(telling)이 붙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 학교 최시한(국어국문학 전공) 교수는 스토리텔링을 “이야기 하거나 창작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스토리와 가장 비슷한 의미의 우리말 단어가 이야기이므로, 이야기를 하거나 창작하는 것이 스토리에 ‘말하다(telling)’라는 의미를 더한 스토리텔링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근래에 부쩍 회자되고 있지만 특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라고 말했다.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네 가지 *담화 형태 중 대부분이 서사이기 때문이다. 서사는 이야기하기와 비슷한 뜻을 갖는다. 또한 최 교수는 “한국어에서 ‘이야기하다’가 ‘말하다’와 바꿔 쓰이기도 하듯, 인간은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존재이므로 스토리텔링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평범한 스토리텔링이 지금에 와서 왜 특별해진 것일까?


우리는 매 초마다 논문, 기사 등의 정보가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죽을 때까지 전공 분야의 정보조차 전부 습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보 제공자 쪽에서도 ‘어떻게 하면 내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생긴다. 그리고 이 고민해결법 중 하나가 정보를 서사구조로 전달하는 것이다. 정보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낼 때, 집중도와 몰입도가 높아지고, 오래 기억할 수 있어 정보가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도 지난 2002년 스토리텔링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야기 창작 연계전공과정을 개설해 현재는 60여 명의 학우들이 이 연계전공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의 스토리텔링은 디지털과 접목돼 디지털스토리텔링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카이스트 김탁환(문화기술대학원 디지털스토리텔링 전공) 교수는 최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디지털 자료화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혜초가 여행 도중 겪은 사건들을 다양한 디지털 컨텐츠로 변용할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왕오천축국전 자체는 재미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3D로 만들면 혜초가 보았던 사자상을 실제로 느낄 수 있는 등 생생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왕오천축국전과 3D의 결합, 다시 말해 인문학과 공학의 결합이다. 김 교수는 “디지털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과학화ㆍ객관화시킬 수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나온 것”이라며, “이야기의 과학화는 예를들어, 공포영화를 볼 때 어느 순간에 가장 큰 공포를 느끼는지 체온이나 땀을 통해 확인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스토리텔링은 네트워크화된 컴퓨터 환경에서 디지털 매체를 통해 이뤄지는 스토리텔링을 말한다. 소설이나 전설, 신화와 같은 기존의 이야기가 디지털 미디어라는 기술과 만나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낸 것이다. 디지털스토리텔링은 오락적 기능을 하는 엔터테인먼트 디지털스토리텔링과 정보를 전달하는 인포메이션 디지털스토리텔링으로 나뉜다. 엔터테인먼트는 디지털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디지털 콘텐츠를 포함한다. 인포메이션은 주어진 정보를 가공, 편집하는 과정을 거쳐 나온 디지털 광고, 디지털 박물관, e-러닝, 디지털 자서전 등을 말한다. 이처럼 다양한 곳에서 활용되는 디지털스토리텔링은 국제경쟁력을 갖춘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2003년, 디지털스토리텔링 학회가 설립된 이후, 여러 학교에 관련학과가 개설되거나 국문학과가 디지털스토리텔링학과 혹은 디지털문화콘텐츠학과 등으로 바뀌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듯, 디지털 시대의 스토리텔링을 둘러 싼 우려도 있다. 사색적인 독서와 멀어져 디지털 미디어의 쾌락에만 관심을 둘 수 있고, 문학의 경건하고 엄숙한 가치가 감소할 수도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또한 국문학과가 문화컨텐츠에 관한 실무를 배우는 학과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 인문학의 위기를 가속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 사회, 문화산업 시대에 인문학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우리 학교 이야기 창작 연계전공 커리큘럼에는 ‘모든 과목의 역사’라는 과정이 있다. 미술사, 경제사, 어떤 것의 역사든 연계전공 수강과목으로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최시한 교수는 이러한 과목인정에 대해 “스토리텔링의 재료는 인문ㆍ사회학적인 것이다. 역사가 이야기 그 자체이기 때문에 역사없이 스토리텔링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김탁환 교수의 왕오천축국전 디지털화 작업도 역사의 고증 없이는 불가능 한 것이다. 김 교수는 “디지털 복원도 어떤 흔적이 없으면 원래대로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기본적인 원전이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아무리 현란한 디지털 기술이 사용된 영화라 할지라도 서사 구조가 빈약할 때 관객들로부터 번번히 외면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탄탄한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는 문학의 중요성도 알 수 있다.

인간이 말을 하면서부터 스토리텔링은 전기 및 수기, 다큐멘터리와 영화의 형태로 우리 주변 곳곳에 존재해 왔다. 21세기에는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되는 인문학이 스토리텔링을 색다르게 구현해주는 문화산업과 디지털을 만나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미래의 스토리텔링은 어떤 모습일까. 다음번에는 스토리텔링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된다.

*부룩스와 워렌은 서구 수사학의 전통을 바탕으로 담화형태(form of discourse)를 설명, 논증, 묘사, 서사로 분류했는데, 이는 화자(작가)의 필요와 의도에 따라 사용하는 표현을 나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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