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감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죠. 이 직장에서 일하는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대구 지하철 방화, 쓰나미 참사, 서래마을 영아유기, 유영철 연쇄살인……. 신문의 1면을 장식했던 사회의 사건ㆍ사고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덜컹 내려앉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건의 변두리에서 눈물을 훔칠 때, 사건 속으로 뛰어들어 남아있는 ‘사건의 진실’을 발굴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진원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연구원들이다. 이곳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해 두문불출하는 국과수 법과학부 부장 정희선(약학 78졸) 동문을 만났다.


'여성' 버렸더니 '최초여성부장' 되더라

우리 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하던 정 동문이 국과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한 강연을 통해서였다. “대학교 4학년 때 전 국과수 소장님이 학교로 강연을 오셨어요. 굉장히 흥미로웠죠.” 국과수는 마약ㆍ살인 등 쉽지 않은 강력 범죄 해결을 지원하는 곳이지만 정 동문의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당시 국과수는 들어가기보다 남아있기가 더 어려운 곳이었다. “면접에서 저에게 3년은 꼭 있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그만큼 버티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3년이 몇 번 갔는지 몰라.(웃음)” 정 동문은 단지 연구소의 일이 재밌고 좋아 오랫동안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말했지만 ‘여성 최초 국과수 부장’이라는 타이틀은 그의 실력을 대변한다. 혹시 여성이라는 점이 걸림돌이 된 적은 없었을까. “전혀요. 오히려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정 동문은 여성들 스스로 여성이라는 겉모습을 버리고 남성과 똑같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철저한 실력주의자라는 정 동문은 “약독물과나 마약분석과에는 오히려 여성의 비율이 높아요. 세밀함이 필요한 실험이 주를 이루거든요.”라고 말했다.


정 동문의 전문분야는 마약이다. 그는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고 미국 LA경찰국 범죄과학연구소, Ohio주 클리브랜드 법검시관 사무소, 영국 런던대 킴스컬리지에서 연수를 받기도 했다. 해외와 국내의 수사방식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한국의 방식이 연구원들 스스로 생각할 여유를 준다.’는 면에서 더 좋은 것 같단다. “미국은 이미 범죄의 양상이 다양해 유통되는 마약이 일정한 편이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신종마약이 들어올 여지가 있어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것도 그 원인이 될 수 있겠죠.”


정 동문이 연구소를 벗어나 찾아가는 현장 역시 ‘마약’ 관련 범죄가 벌어진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마약을 키운 사람이 체포됐었어요. 방을 쿠킹호일로 도배 하고 온도조절도 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재배했더라고요.” 현장으로 출동한 정 동문은 ‘방의 온도와 습기’ ‘마약의 재배상태’ 등을 검사했다. 이처럼 범인이 이미 체포됐을지라도 사건은 늘 그에게 새로운 연구 과제를 남긴다.


현실 속의 드라마, 국과수의 과학수사

사실 국과수는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DNA 분석으로 서래마을 프랑스 영아유기 사건을 해결하며 ‘국가의 자랑’으로 떠올랐고, 2006년에는 우리나라를 행복하게 해준 기관 77개에 선정되기도 했다. ‘과학수사’를 다룬 미국 드라마 ‘CSI’ 역시 국과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드는 궁금증 하나, 국과수 연구원들도 범죄 관련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볼까? 정 동문의 대답은 “NO”이다. “드라마는 단지 드라마거든요. 어떤 사건이든 한 시간 안에 해결되지 못해요. 그런데 간혹 ‘거기(CSI)서는 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느냐.’라고 말씀하는 분들도 있죠.” 그러나 정 동문은 ‘CSI 효과’의 긍정적인 면도 크다고 한다. “우리가 나서서 홍보하지 않아도 연구소로 오는 인재가 많아지고 있어요. 또, 어쩌면 미래에는 드라마처럼 픽션(fiction)적 요소로 범죄가 해결될지도 모르죠. 상상은 항상 앞서는 거니까요.”


국과수는 크게 법의학과ㆍ생물학과ㆍ범죄심리과ㆍ문서사진과로 이뤄진 ‘법의학부’와 약독물과ㆍ마약분석과ㆍ화학분석과ㆍ물리분석과ㆍ교통공학과로 이뤄진 ‘법과학부’로 나눠진다. ‘뭐가 이렇게 많을까…….’ 싶지만, 그만큼 사건의 종류와 수사에 동원되는 과학 분야가 방대하다는 뜻이다.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물리과에서 피해자의 목에 남은 교살 흔적, 찢겨진 옷의 모양 등을 보고 범행 도구를 밝혀내고, 화학과에서는 옷의 섬유를 분석해 범인이 남긴 실낱같은 흔적을 잡아냅니다.” 이 외에도 범죄심리과에서는 최면을 이용해 목격자의 기억을 되살리고, 문서영상과에서는 CCTV에 잡힌 용의자의 모습을 최대한 자세히 묘사해 낸다. “유영철 사건의 경우 유영철이 전봇대를 지나가는 모습을 잡은 CCTV 외엔 별다른 증거가 없었죠.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다 가리고 있었지만 전봇대와 비교해 키를 추정했고, 나중에 그것이 정확히 일치했어요.” ‘범인이 지나간 곳에서는 반드시 범인의 뭔가가 떨어져 있다.’ 과학수사의 원칙이자 믿음이다.


생활 속 범죄에도 국과수의 손길은 미친다. 음주운전으로 단속된 사람들이 결백을 주장하면 경찰은 혈액을 채취해 국과수로 보낸다. 하루에 200건이나 된다. 가짜 서명이나 교묘히 바꾼 숫자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다. “1자를 4자로 고치면 천만 원이 사천만 원이 되죠. 문서영상과에서는 이런 필체 위조를 적발합니다.” 또, 가짜 꿀이나 양주는 식품분석실에서 골라낸다. “이처럼 수사에 관계된 것, 사람들이 고소ㆍ고발한 것은 여기로 다 들어온다고 보면 됩니다.” 그만큼 ‘국과수의 연구 결과’라고 이름 붙여진 증거의 신뢰도가 크다는 뜻이다.


'독문과' 교수님 기억하는 '약학과' 학생

정 동문은 우리 학교에서 약학 박사 과정까지 밟았다. 숙명에서 보낸 시간이 긴 만큼 간직하고 있는 추억도 한 보따리이다. ‘공부’를 좋아했지만 ‘공부만’은 싫어한 정 동문은 ‘적십자단’이라는 봉사활동 동아리 뿐 아니라 총학생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때는 학생회를 학도호국단이라고 했어요. 학생회 활동 덕분에 학교에서 국과수에 절 적극 추천하기도 했죠.” 그가 기억하는 ‘숙명’에는 축제도 빠지지 않는다. “지금 약대 자리가 그땐 공터였어요, 거기서 모두 한복 입고 아주 재밌게 놀았는데, 지금은 상상도 안 되죠?” 기억에 남는 교수님을 묻는 질문에도 ‘독어독문학과’ 이귀경 교수를 꼽았다. 전공도 아니고 인문계열의 교수님이라니 예상 밖의 대답이다. 이 교수는 정 동문이 ‘적십자단’에 있을 때는 지도교수를 맡았고, ‘총학생회’에 있을 때는 학생처장으로 재직했다. “그만큼 인연이 깊은 분이예요. 좋은 말씀도 참 많이 해주셨고……. 그 분 강의도 열심히 들었죠.” 학과에 구애받지 않고 30여 년 전의 캠퍼스를 이곳저곳 누비는 정 동문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숙명’을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기자의 말에 정 동문은 ‘고향’이라고 답했다. “자주 가지는 못해도 ‘거기쯤에 있을 거다.’는 생각, 지나칠 때면 반갑고, 친구들과 만나서 얘기하고, 그런 아련한 마음의 고향이에요.”


그는 고향의 숙명인들에게 “Aim High.”라는 말을 당부했다. “학창시절에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목표를 높게 설정하는 거예요. 목표가 높아야 달성지점도 높아지거든요.”


그렇다면 정 동문의 목표는 무엇일까. “지금은 우리 연구소의 연구 결과가 100% 신뢰감을 주는 데까지 도달했어요. 하지만 절대 이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되죠.” 그의 목표는 국과수를 세계적인 과학수사연구기관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나라가 작아서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삼성이 있고 LG가 있잖아요.” 국과수도 얼마든지 세계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정 동문은 “제가 그 든든한 밑바탕이 될 겁니다.”라며 다짐하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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