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금모으기운동

원인

일본으로부터의 차관도입

IMF 외환위기

목표

의연금 1300만 원 모금

250억 달러치 금모으기

모금결과

목표액의 약 17.6% 230만 원

목표액의 약 8.7% 21억 7처만 달러치의 금

한계

총체적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음

의의

총체적 경제위기 극복의 자신감과 애국정신 고취

국채보상이 금모으기보다 기부 성격 강해
부유층에 비해 서민 참여도 높아
운동의 구심점인 애국애족정신이 자칫하면 폐쇄적 민족주의 불러올 수도


10여 년 전 IMF(국제통화기금) 시기에 전개된 금모으기운동은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금모으기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이 비슷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국채보상 운동 100주년, IMF 사태 10주년을 맞아 두 운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시사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두 운동은 경제위기에서 시작됐다. 일제는 1904년부터 조선의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고자 대한제국 정부에 돈을 빌려줬다. 차관도입의 명목은 화폐 개혁, 교육제도 개선, 금융기관 확장정리 등이었다. 1907년 2월, 정부는 외채를 도입한 지 2년여 사이에 1천3백만 원의 외채를 떠안게 됐다. 이 금액은 당시 대한제국의 1년 예산에 달했으며, 현재로 따지면 최소 1조 4,000억 원이 넘는다.
이로부터 90년이 지난 1997년에는 임창렬 경제부총리가 IMF 구제금융신청을 공식 선언했다. 국가가 부도위기에 처한 것이다. 전문가들 간에 견해가 달라 위기의 원인을 규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대기업들의 연쇄부도가 큰 원인으로 지적된다. 10월 하순부터 한국의 위기를 감지한 외국 금융기관들은 하나 둘씩 한국 금융기관에 외화자금 회수를 요구했다. 한꺼번에 몰리는 회수요구에 금융기관들은 한국은행에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응하다보니 12월 18일 한국은행의 가용외환보유액*은 39달러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보름 전 IMF로부터 지원금 56억 달러가 제공된 이후였기에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한국은행 국제부 부부장으로 재직했던 경기개발연구원 조성종 수석연구위원은 “당시 한국은행이 국내금융기관에 지원하는 금액이 많을 때는 하루 20억 달러에 달했다. 이 상태가 이틀만 더 지속됐어도 우리나라는 외채 상환불능상태(Default)에 빠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 야욕이라는 외부적 요인이, 금모으기 운동은 대기업의 부도라는 내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양 시대의 국민은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1907년 1월 29일 김광제와 서상돈은 “국채를 갚는 방법으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이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300만 원을 모을 수 있다.”며 국채보상운동을 제안했다. 노비와 백정은 그들의 품삯을, 여성은 가락지와 은장도를 유학생과 재외동포들은 의연금을 보내왔다.
IMF 시기 때 국민도 너나할 것 없이 금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TV에서는 연일 금모으기 운동 특별방송을 편성해 방영했고 국민들은 돌 반지며, 장롱 속 금비녀, 결혼예물 등을 기부하거나 팔고자 은행에 장사진을 쳤다.
IMF 당시에는 왜 ‘돈’이 아닌 ‘금’을 모았을까. 그 이유는 한마디로 우리나라에 부족했던 것이 원화가 아니라 외화였기 때문이다. 조 위원은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화를 벌어들여야 하는데, 가장 빨리 외화를 버는 방법은 화폐대용품인 금을 수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수출품을 생산하려면 원자재를 수입해서 가공해야 하는데, 외환위기 상황에서는 원자재 구입조차 힘들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위험하다는 설명이다. 이어 “현재도 금은 대외지급수단이다. 중앙은행이 보유한 금 역시 외환보유액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금이 외화인 셈이다.
국채보상운동위원회 김영호 회장은 “금모으기운동 때는 금붙이와 돈이 교환됐지만, 국채보상운동 때는 개인이 자산을 온전히 기부했다.”고 말했다. 국채보상운동에 기부 성격이 더 크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은 정부를 무상 지원하자는 것이었고, 금모으기운동은 수출로 외화를 확충하자는 운동이다.
두 운동이 총체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는 한계점도 있다. 국채보상운동의 경우 일제가 조선의 재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국가의 빚을 갚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금모으기 운동 역시 국가의 경제 위기를 벗어나게 할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조 위원은 “금모으기운동이 외환보유액 확충에 큰 도움을 줬지만 그것만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경제부분 외의 시사점으로는 참여 계층이 비슷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 운동 모두 외채를 도입해 혜택을 받거나 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세력보다 아무 잘못 없는 일반 국민이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소외세력인 여성들이 많이 참여했다. 대구 남일동의 부인 7명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어찌 남녀가 다르랴”라며 그 자리에서 몸에 지닌 돈과 폐물을 내놓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효시가 됐다. 올해 초 발행된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우표에도 국채보상운동의 여성참여를 기념한 형상이 그려져 있다.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상원 부회장은 “우표는 금가락지 속에 태극기가 그려진 모양인데, ‘가락지에 담긴 여성들의 애국심’을 상징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모으기운동 역시 부유층의 참여보다 소시민의 참여율이 높았다. 서민들은 지금껏 소중히 간직해온 금반지, 결혼예물에서부터 금니까지 십시일반으로 내놓아 국가 위기를 함께했다. 이처럼 우리 국민은 나라의 위기를 제 집의 위기처럼 생각하고, 심지어 지도자와 나라의 잘못까지도 떠안으며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국민의 깊은 애국심과 민족주의에서 비롯된다.
애국심과 민족주의는 두 운동처럼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민족주의가 강한 나라에서는 다른 인종이나 민족을 배척하는 폐쇄적 민족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지난 8월 18일 UN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사회에 ‘단일민족’ ‘순수혈통’과 같은 용어와 인종 우월적 관념이 널리 퍼져 있다며 “한국은 인종차별적 요소를 없애고 다 인종적 성격을 인정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한국은행의 외화자산 중 국내 금융기관에 빌려준 돈을 제외한 것이 한국은행의 가용외환보유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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