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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특사단 현장르포
김예람 기자  |  smpkyr72@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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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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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그 덴하의 HS역 앞.  
 

2007년 7월 12일. 헤이그 덴하의 HS역 앞.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서늘하다. 100년 전 같은 장소에서 3인의 특사단이 바라본 헤이그의 하늘도 이처럼 맑았을까. 아마 그들의 눈에 비친 하늘은 암담함과 불안감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전국에서 선발된 18명의 대학생 헤이그 특사단은 8박 9일 동안 헤이그특사의 발자취를 쫓아 현장취재 한다. 기자는 속초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과 중국 하얼빈, 독일을 거쳐 5일 만에 네덜란드 헤이그 땅을 밟았다. 실제 특사단이 헤이그에 도착하기 까지 67일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니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굳게 닫힌 문, 만국평화회의장 앞에서.
1907년 6월 25일. 세 특사가 힘겹게 도착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이미 만국평화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암담한 심정이지만 결의에 찬 발걸음으로 회의장을 향해 걸어갔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비넨호프 궁전을 걸어본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됐던 비넨호프 왕궁의 기사홀은 현재 상원의사당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헤이그특사 3인에게 기사홀의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결국 그들은 굳게 닫힌 회의장의 문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이위종은 암담한 심정을 억누르며 기사홀 앞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 때 <평화회의보> 기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비넨호프궁의 기사홀.  
 

기자-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 모임의 평온을 깨뜨리십니까?
이위종-나는 흔히 재단이 헤이그에 있다고 말하는,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혹시라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중략)
기자-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그렇다면 이 세상에 정의란 없는 것이군요. 여기 헤이그에 조차도! 당신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려는 것이로군요. 결국 가증스럽게 당한 치용을 회복할 길은 없고, 정당한 조약이 불법적으로 위반된 사실에 대한 한 민족의 항의가 무시되어질 수 있으며, 또 한 나라의 독립은 그것의 국제적인 보장 여부와 관계없이 침탈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제국주의 열강의 힘의 논리 앞에서 비통함을 느꼈을 그들을 생각하며 기자도 그 계단에 앉아 본다. 정의와 평화를 간절히 갈망하며 회의장 문을 두드렸지만 국제사회는 끝내 약소국의 상황을 헤아려 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비넨호프궁의 거대한 몸집은 넘을 수 없는 벽같이 절망적으로 보였으리라.

   
 
  이준 열사 구 묘역.  
 

 

낯선 땅 비통한 죽음, 열사의 묘역에서.
7월 14일. 이준 열사는 분통한 나날을 보내던 중 끝내 순국했다. 정사였던 이상설은 7월 17일 그를 뉴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그 후, 9월에 이상설과 이위종은 그 묘지를 영구임대하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준 열사의 유해는 1963년에 고국으로 운구 돼 수유리에 안장됐지만 옛 묘역은 지금도 현장에 보존돼 있다. 아이큰다우 공동묘지 안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자 ‘일성 이준 열사의 묘적’이라고 새겨진 비석과 이준 열사의 동상이 나타난다. 묘적 앞에는 이미 누군가 헌화하고 간 싱싱한 국화꽃이 놓여있다. 열사의 묘적에서 묵념을 한 후, 대학생 특사단의 눈빛은 모두 숙연해졌다.

7월 14일. 이준 열사는 분통한 나날을 보내던 중 끝내 순국했다. 정사였던 이상설은 7월 17일 그를 뉴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그 후, 9월에 이상설과 이위종은 그 묘지를 영구임대하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준 열사의 유해는 1963년에 고국으로 운구 돼 수유리에 안장됐지만 옛 묘역은 지금도 현장에 보존돼 있다. 아이큰다우 공동묘지 안으로 한참 걸어 들어가자 ‘일성 이준 열사의 묘적’이라고 새겨진 비석과 이준 열사의 동상이 나타난다. 묘적 앞에는 이미 누군가 헌화하고 간 싱싱한 국화꽃이 놓여있다. 열사의 묘적에서 묵념을 한 후, 대학생 특사단의 눈빛은 모두 숙연해졌다.

머나먼 타지에서 울분 속에 삶을 마감했던 이준 열사. 그의 슬픈 죽음을 기억하고, 그가 순국한 장소에 태극기를 나부끼며 열사의 치열했던 삶을 기리는 노부부가 있다.

기억하는 자 그들이 있기에, 이준열사기념관.
HS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바헌스트라트가 124번지에는 ‘이준열사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100년 전 ‘드용 호텔’로 3인의 특사가 묵었던 숙소이기도 하다. 그 후 교민 이기항(70) 송창주(67) 씨 부부가 건물을 사들여 1995년 기념관으로 재단장 했다. 이국땅 네덜란드에서 바람에 힘차게 흩날리고 있는 태극기를 보자 반가움과 자랑스러움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이준열사기념관 이기항 원장은 “이준 열사가 순국한 자리인 이곳을 역사 유적지로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에 기념관을 세우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부부는 수 년 동안 이준 열사의 후손을 설득해 유품을 받고, 매일같이 고서점을 출입하며 지금의 자료들을 모았다. 기념관에는 이준 방, 평화 방을 비롯해 그의 유족이 기증한 친필 이력서과 자필 청원서 진품이 전시돼 있다. 또 만국평화회의에 대한 자료로 초청국 명단, 세 특사의 탄원서, 미국한인회 호소 전문 등의 자료들도 있다. 이씨는 “어떤 분야에 있든 역사는 가장 기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요즘 네덜란드를 찾는 우리나라 여행객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을 걱정했다. “헤이그에 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기념관을 찾고 열사를 기억해준다면 우리 역사 속에서 이준 열사는 영원히 살아계실 겁니다.”

   
 
  이준 열사 기념관  
 



8박 9일의 여정을 18인의 특사단과 함께한 김용달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원은 “순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선택하는 것이 역사의 선택이다.”며 “힘이라고 하는 당대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의라는 역사의 선택을 해야 영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헤이그특사는 결과적으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정의라는 역사의 선택을 믿고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동분서주했다. 그들은 성명서를 각국 대표에게 발송하고,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서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를 발표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치렀던 그들의 눈물겨운 희생은 훗날 대한제국의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동정적 여론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헤이그에서의 일정을 마치며 지금의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00년 전 자랑스러운 선열들의 투쟁과 나라사랑의 열기가 지금의 대한민국을 일군 힘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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