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기사 발간이 시작된 이후 필자는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매 순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다. 필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바닥난 체력도, 저만치 앞서있는 동료 기자들에 대한 부러움도 아니다. ‘비판하는 것의 두려움’ 그것이 늘 필자를 숨 막히게 한다.

숙대신보 기사를 준비하며 만난 취재원은 필자와 숙대신보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준 ‘귀인’이다. 그들의 업적, 말, 생각들을 적절히 인용해 기사를 작성한다. 신문은 홍보지나 잡지가 아니기 때문에 소재를 소개만 하고 끝낼 수 없다. 기자는 아쉬운 부분은 무엇인지, 보완책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까지 기사에 녹여내 독자들에게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일이 항상 망설여진다.

기자로서 마주한 취재원에게는 나름대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제시되는 대안을 실행할 수 없는 그들의 사정을 충분히 들었지만, 독자들의 알 권리와 기사의 본래 취지와 목적을 위해 아쉬운 부분도 기사에 써야 한다. 문화면에서 주로 취재를 하는 대상은 개인 업체다. 자신의 사업에 아쉬운 내용을 담은 기사를 읽고 ‘기자님 제가 그때 충분히 설명해 드렸잖아요’라며 서운하다는 답변이 온다. 그러나 이미 하나의 흐름으로 작성된 기사이기 때문에 수정할 수 없다. 그때부터 혼자만의 공황 상태가 시작된다. 그 순간이 두려워 소극적으로 글을 작성한다. 그렇게 필자의 글은 기사가 아니라 업체 홍보지가 됐다.

동료 기자들은 문화면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고 필자의 잘못이 아니라 위로한다. 그러나 필자는 알고 있다. 필자가 단단하고 강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준비하고 노력해서 논리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면 기사와 독자, 취재원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을 것이다.

후회와 자책보다는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더 크다. 전하고자 하는 바를 주저하지 않고 써내려 가려면 우선 필자 스스로가 소재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해야 한다.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면의 주관이 단단해져야 취재원의 서운한 불평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비판하는 것의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더 이상 노력하는 기자가 아닌 잘하는 기자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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