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사람들]

이정희는 여성의 사회 활동에 제약이 아주 많았던 1920년대에 18세의 나이로 비행사가 된, 의지가 굳고 개척정신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1910년 1월 서울에서 출생했다. 숙명여고보 보통과에 다니던 12세 때 그녀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가던 길에 공중에서 프로펠러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고 ‘나도 저렇게 날아보고 싶다, 여자도 남자처럼 손이 둘인데 여자라고 안 될 리가 없다’ 생각하고 비행기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비행기 자체가 큰 구경거리였던 시절, 장안을 들썩였던 안창남의 고국방문 비행을 보고 그녀는 부모한데 비행학교에 가겠다고 조르기도 했다. 

1924년(15세)에 숙명여고보 보통과를 졸업하고 이어서 숙명여고보 고등과에 입학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2학년 말에 중퇴한다. 자동차 운전이 비행사가 되는 데 도움이 된다 해 여자 운전사가 없던 그 시절에 자동차회사에 취업해 운전을 배우던 1926년 7월, 일본의 나고야 비행학교가 조선 전역을 돌며 모험비행대회를 열었다. 비행기를 타고 싶은 마음이 불타올라 그녀는 다짜고짜 청을 하여 거기 참여했다. 

그들이 귀국하며 일본에 초청하겠다고 했으나 연락이 없자 그녀는 백방으로 비행학교에 갈 궁리를 했다. 그러다가 비행사 서웅성을 알게 되어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청춘남녀가 같이 다니면 오해를 받는다 해 양쪽 부모가 의남매를 맺어줬다. 결혼을 시킨 게 아니라 그녀를 동생으로 삼아 둘을 남매로 만든 것은 그 ‘오빠’ 집안의 반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1926년 11월 일본으로 간 그녀는 다음 해 10월 삼등비행사 자격증 취득했다. 한국 여성으로서는 권기옥, 김경원에 이은 세 번째 비행사였다. 일단 꿈을 이뤘으나 고된 과정이었고, 서웅성이 비행기를 사려고 모아뒀던 돈을 자기가 썼기에 번민도 컸다. 19세가 된 1928년 2월 귀국 인터뷰에서 왜 비행사가 되고자 했는지를 묻자 그녀는, 나의 목적을 다 밝힐 수는 없다, 내가 먼저 배워서 나중에 후진을 가르치는 비행학교를 조선에 세우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고국방문 비행을 후원하기 위해 숙명여고보에서는 2월에 이틀간 음악회를 열었고, 동문회인 숙녀회에서도 3월에 음악회를 개최해 자금을 모았다. 

이정희는 1929년에 2등 비행사 자격을 취득했으나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아 나아갈 길이 없었다. 무용가 최승희와 동기동창이라 무용에도 관심을 가져보다 그만뒀다. 1931년 그녀는 다시 ‘여자 운전사’가 되어 돈을 모았고, 미국에 가서 비행사의 꿈을 펼치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는 명목으로 중국 상해로 갔다. 거기서 의사 이성영과 사랑에 빠졌으나 실연으로 끝나는 바람에 오래 칩거했다.

그녀의 꿈은 해방과 더불어 일부 이뤄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월 한국 공군 최초의 여군이 됐고, 대위 계급으로 여자항공교육대를 창설하여 사관생도를 양성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를 모르게 됐다. 불꽃같은 일생을 살아온 사람에게 역사는 그렇게 참혹했다.
 

최시한(숙명역사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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