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A양은 남자 교사의 꾸준한 성차별 발언에 시달렸다. 남자 교사는 A양에게 ‘여자는 시집이나 가야지’나 ‘여자는 조신해야 돼’ 등의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았다. 이러한 발언에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A양은 뭔가 대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성차별 발언을 하지 말자’는 벽보를 만들어 학내에 게시했다. A양은 자신이 쓴 벽보를 통해 학교에 변화가 생기길 기대했지만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건 욕설과 비난이었다. 일부 남학생들은 A양의 사회관계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이하 SNS)에 부정적인 댓글을 달며 A양에게 ‘예민하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SNS상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A양을 마주치면 친구들은 수군거리거나 심한 경우 욕설을 하기도 했다.

성차별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에 돌아온 것은 비난뿐이었다. 이처럼 학교라는 사회 속에서 생활하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성평등은 어떤 것이며, 이들은 학교에서 어떤 성평등 교육을 받고 있을까?


교실 속 불편한 목소리
최근 ‘페미니즘(Feminism)’이 대두됨에 따라 학교 곳곳에 스며들어 있던 성차별적 관행들이 수면 위로 떠 오르고 있다. 흔히 사회의 축소판이라 일컬어지는 학교 내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학교 내 성차별은 아직도 만연하다.


학창시절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던 고경진(법 18) 학우는 “고등학생 때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가며 주변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 학우는 “교내에 만연했던 성차별적 분위기와 혐오표현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고 바꿔나가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성차별을 개선하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들의 페미니즘 인식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본지는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는 지난 8월 넷째 주부터 9월 둘째 주까지 약 3주간 서울특별시 내 남녀공학 고등학교(이하 남녀공학), 여자 고등학교(이하 여고), 남자 고등학교(이하 남고) 각 세 곳을 임의로 선정해 고등학교 2학년 학생 756명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신뢰도 95%, 오차범위 ±1.8%p)

설문조사 결과 청소년 대부분은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설문에 응답한 총 756명의 학생 중 96.0%(721명)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들어봤다고 답했다. 이현애 고등학교 교사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페미니즘 문제가 큰 관심을 끌고 있다”면서도 “페미니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무조건 공격적, 혐오적인 태도를 보이는 학생도 있어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페미니즘을 알게 된 경로에는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 이하 SNS)가 각각 68.8%(497명)와 68.3%(493명)로 가장 많았고, ‘유튜브(YouTube)’가 46.4%(335명)로 그 뒤를 이었다. TV프로그램, 서적이 각 28.7%(207명), 21.7%(157명)인 것을 고려하면 인터넷 매체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 이 교사는 “교내에서 페미니즘이 공개적, 직접적으로 논의되기 힘든 분위기라 학생들이 자신의 견해와 고민을 인터넷상에서 익명으로 해결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처럼 인터넷 매체만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을 기를 경우 주의가 필요하다. 잘못된 인식이나 편협한 사고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교사는 “학생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드러내는 경우, 인터넷 등의 매체에서 등장하는 논리나 근거를 쉽게 수용해 자신의 논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며 인터넷에 의존해 페미니즘을 접하는 실정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이어 이 교사는 “편안하고 안전한 방법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논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은 학생의 성별과 학교 종류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페미니즘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5점 만점으로 조사한 결과 여학생의 점수 평균은 3.5점인 반면 남학생의 점수 평균은 2.1점에 불과했다.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페미니즘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남고의 인식 점수 평균은 2.0점, 공학은 2.7점으로 부정적인 편에 가까운 반면, 여고의 점수는 3.6점으로, 앞선 두 종류의 학교보다 긍정적인 편에 가까웠다.

여고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페미니즘에 대해 “사람이 사람의 인권을 보장해 달라고, 평등하게 대우하자고 운동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페미니즘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또 다른 한 학생은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적인 대한민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성차별과 여성 혐오에 대해 사람들이 알게 됐다는 증거이다”며 “우리 사회가 남녀가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게 이끄는 생각이다”고 답했다.

반면, 페미니즘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보인 남고의 한 학생은 “국내 성차별의 심각성과 여성의 권리 침해에는 공감하고 사회가 진지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임에는 동의한다”면서도 “페미니즘의 본질을 왜곡하는 혜화역 시위나 ‘워마드’ 같은 사이트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권리의 침해에 대한 해결책이 또 다른 권리 침해로 이어지는 것은 합리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페미니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해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학생도 다수 존재했다.

본인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며 성차별 문제에 대항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에 이 교사는 “학교에서 여러 성차별 문제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꽤 있다”며 “용기 있는 실천을 하는 학생들의 노력을 학교가 좀 더 권장하고 격려할 수 있도록 교사와 학교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내에서 페미니스트임을 밝혔을 때 불이익을 받은 사례도 존재했다. 남고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친구가 학교에서 「82년 생 김지영」이라는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읽자 반 친구들에게 욕설을 들었다”고 말했다. 여고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지인이 교내에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 알려져 남학생들의 괴롭힘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는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청소년기는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이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성 평등 교육은 필수적이다. 이 교사는 “성 평등에 대해 청소년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면 왜곡된 성 평등 인식을 가질 수 있다”며 “이렇게 형성된 왜곡된 성평등 인식은 성인이 된 후 개선하기 어렵다”고 청소년기 성 평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성평등 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교내 성 평등 교육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62.9%(449명)의 학생이 ‘예’라고 답했으나 ‘아니요’라고 답한 학생 또한 전체의 37.1%(265명)를 차지했다. 교내 성평등 교육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답한 학생들은 주로 강연, 토론 수업 등을 통해 성평등 교육을 받고 있었다. “성평등 교육 강사가 학교에 방문해 여러 차례 강의를 받았다” “범교과 시간에 페미니즘을 주제로 수업을 했었다” 등 몇몇 학생들이 성평등 교육에 만족하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 “성폭력 예방교육만 할 뿐 성평등에 관한 교육은 받아본 적이 없다”거나 “성평등 교육을 한다고 해도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보단 그저 영상을 보거나 강연을 듣는 것이 전부라 효과가 없다”는 부정적 의견도 존재했다. 이 교사는 “현 중, 고등학교에 공식적인 성 평등 교육과정은 거의 없고, 성폭력 예방 교육 정도만 이루어지고 있다”며 부실한 성 평등 교육을 지적하고 현 성평등 교육의 양적, 질적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교육과정 내 불평등한 젠더의식에 대한 모니터링과 개선, 페미니즘 교육의 정식 교육 과정화, 학교 내 성평등한 생활규범 확립이 필요하다”며 “페미니즘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정립하고 사회 이슈에 대한 토론 등을 통해 인식 변화와 실제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여고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거창한 교육보다는 사소한 말버릇부터 고치는 교육이 돼야 한다”며 “교내 성 평등 교육은 학생들이 주의 깊게 참여하지 않으므로 참여도를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평등 교육은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에게도 필수적이다. 청소년기 학생들에게 교사들의 입장과 가치관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김성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장은 “학교에서 교사들의 가치관이 큰 영향력을 갖는다”며 “일부 교사는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은 “교육대학교와 사범대학교의 교원양성과정 교육과정에 ‘성’과 관련된 교과목이 없다”며 “최근 교원 자격 연수에 성에 대한 교과목이 개설되고 있으나 양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고 지적했다.

학생들 또한 교사들의 성평등 교육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한 학생은 “일부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성차별적인 발언 뿐 아니라 성희롱을 하는데 그들을 위한 교육은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다”며 교사를 위한 성평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 학우는 “학창시절 교사가 ‘남자와 달리 여자는 친구들을 만날 때 옷은 명품인지, 가방은 얼마인지, 누가 사준건지 등을 따진다’는 발언을 했다”며 교사로부터 성차별적인 발언을 들은 경험을 전했다. 이어 고 학우는 “교직원 평가시간에 익명으로 불편함을 호소하는 일 밖엔 할 수 없었다”며 분노했다. 이에 이 교사는 “교사 사회 자체가 성평등한 노동 환경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실질적인 법적, 제도적 변화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청소년들은 정부의 국정 기조인 ‘실질적 성평등 사회 실현’의 중요한 주체들”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될 청소년이 이뤄나갈 세상이 모든 성이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올바른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 어른들이 먼저 올바른성 인식을 가지고 올바른 언행을 한다면, 청소년들이 만들 사회는 차별로 점철된 지금의 사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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