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사람들(5)]

이정숙(李貞淑 1858-1935)은 말 그대로 ‘숙명의 사람’이다. 1906년 5월 숙명여대의 전신인 명신여학교가 개교했을 때부터 1935년 그녀가 세상을 뜰 때까지 29년 동안 초대 교장을 맡았다. 그녀가 사망한 직후 동아일보에 연재된 추모의 글에선 “이정숙 여사의 역사가 숙명의 역사”이며, 그녀는 “조선 여자교육의 큰 숨은 은인”이라고 했다.

이정숙은 1858년에 이씨 왕가의 후예로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6세에 역시 왕가 사람인 조영하와 결혼했다. 남편 조영하는 익종의 왕비였던 조대비의 친정 조카로서, 당시 안동 김씨 일파와 권력을 다투던 풍양 조씨 집안 사람이었다. 그는 출세 가도를 달려 1878년 정일품 벼슬에 올랐고, 이에 따라 이정숙은 그 부인에게 주어지는 여성 최고의 영예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됐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수구파였던 조영하는 개화파에 의해 우정국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녀의 나이 27세 때였다.

순헌황귀비는 평소에 이정숙의 기개가 비범하고 지혜가 뛰어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부인회를 조직하면서 그녀를 회장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교육구국운동의 물결 속에서 1906년 5월에 친정 조카 엄주익을 시켜 명신여학교를 설립하자 49세의 그녀를 교장으로 임명했다. 순헌황귀비가 그 한 달 전에 후원해 설립한 진명여학교와 달리 여성을 교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만큼 명신여학교를 특별히 여긴 것이었다.

‘다 큰 여자애가 공부를 한다는 것을 큰 변으로 알던 시대’, 그렇게 여성을 규방을 가두는 문화가 견고했던 시대에, 여자가 여학교 교장이 된 것은 놀라운 일이요 이정숙 본인에게도 특별한 일이었다. 남편을 여의고 자식만 키우며 고적하게 살던 ‘왕실 집안의 마님’이었던 그녀는 “나의 평생을 오직 이 학교에 의탁하고 모든 것을 이 학교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해외의 신문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시대에,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후손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단이었다.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했던 명신여학교는 초기에 모든 것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양반집에서 딸을 보내주지 않아 학생이 부족해 5명의 학생으로 개교식을 치러야 했다. 딸이 있다는 집이면 찾아가 설득을 하는 바람에 그녀를 피하는 부모도 있었다. 여교사도 부족하고 재정도 여의치 않아 많은 비용을 자신이 부담했다. 무엇보다 식민지 현실에서 민족여성교육의 맥을 잇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녀가 어떤 과목을 담당해 가르쳤다는 기록은 없다. 남긴 글이 드물고, 공식 행사 때도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어머니 같이 따르면서도 아버지 같이 어려워했다”고 하는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실행으로 가르치는 교육자였다고 할 수 있다. 창립 30주년이 가까워지면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가 명문학교의 기반을 굳히자 이정숙 교장은,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세우려는 오랜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설립(1937)을 보지도 못하고 78세에 유명을 달리했다. 

최시한(숙명역사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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