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금방 흘러간 방학에 아쉬움을 느끼던 것도 잠시, 벌써 중순을 향해가는 3월의 캠퍼스에는 봄내음이 조금씩 풍겨온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에 옷차림은 갈수록 얇아지지만 교내외로 불어오는 폭로의 바람은 여전히 거세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시작된 국내 미투운동(The #MeToo Campaign)의 불씨는 두 달여가 지난 현재까지도 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처음엔 여느 뉴스거리와 같이 단순히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인식됐던 피해자들의 폭로는 점점 많은 증언과 절규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의 덮여있던 이면을 수면위로 드러냈다. 아직도 매일같이 새로운 피해자가 등장해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음을 알린다. 여성이 당해왔던 성범죄나 부당한 일들은 불운했던 일부가 겪는 일이 아닌 여성들의 곁에 늘 도사리는 위험이었다. 말 그대로 여성은 ‘우연히’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여성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사회적으로 억압받으며 살아왔다. “성범죄를 당하게 된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서 검사의 말처럼, 모든 피해자들은 피해사실에 대해 말을 꺼내기 조차 조심스러웠을 것이고, 폭로에 이르기까지 긴 고민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절박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 사회에서 2차 가해는 너무나도 쉽게 행해진다. “왜 그때는 말하지 않고 이제 말하는 거야?” “바라는 게 있었던 것 아니야?” 같이 쉽게 내뱉어진 질문은 어렵게 입을 뗀 피해자에게 생채기를 낸다.

피해자의 외모나 행실을 평가하는 말들도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용기를 내 뉴스에 출연하고 울먹이며 힘들었던 피해사실을 털어놓은 피해자. 다음날 검색어에 오른 말은 피해자의 얼굴, 피해자의 학력이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 가장 무서운 점은 ‘평범한’ 사람조차 가해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쉽게 뱉은 한 마디는 또 다른 피해자가 굳게 입을 닫게 만든다. 가해자의 편에 섬으로써 또 다른 누군가를 가해자로 만든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 ‘중립’이 될 수는 없다. 무관심은 피해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던 기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가만히 있기를 택한다면, 그것은 현상이 유지되는 것을 택하는 것과 다름없다. 현재 상태가 유지된다면 결국 웃는 것은 자신에게 큰 피해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가해자일 것이다.

더 이상 남의 일이라며 방관해선 안 된다. 연대해야 한다. 용기를 낸 피해자의 손을 잡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나’ 또한 피해자가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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