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불치병에 걸린 딸을 가진 가족의 아픔이 몇 년 전 방송에 소개됐다. 수술비를 구하기 힘들어 눈물로 호소하는 아빠의 모습은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후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딸의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지난 9월 ‘서울특별시버스운송사업조합’ 민원게시판에 한 버스 기사를 신고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4살 아이가 버스에서 내린 후 아이의 엄마가 하차하려고 할 때, 문을 닫고 출발했다는 버스 기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당시 목격자라는 사람의 주장이 담긴 글과 함께 버스 기사가 적반하장으로 엄마에게 욕설했다는 기사까지 올라왔다. 이를 본 국민들은 분노했고, 버스 기사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두 사건에서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얼마나 많이 속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던 ‘어금니 아빠’, 현재 그는 ‘여중생 살인사건’의 주범이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민의 후원금으로 몇천만 원이 넘는 문신을 하고 외제 차를 사는 것 외에도 성폭행·성매매와 같은 만행을 저질러 왔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그 당시 우리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후원금을 쏟아 부었다. 

몇 달 전 ‘240번 버스 사건’에선 목격자라는 사람의 글만 읽고 ‘목격자’ 단어 하나에 의심의 여지도 없이 비난하기 바빴다. 240번 버스 기사의 딸이 글을 올리지 않았거나 한 기자가 직접 버스를 타고 증거를 찾아 기사를 올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과연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하려 했을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얼마나 의심하며 살고 있는가. 또 다른 예시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책상은 평평한 직사각형이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울퉁불퉁하기도 하고 뾰족하기도 한 다양한 면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책상이 평평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감각, 특히 시각에 속아 속된 말로 ‘뒤통수를 맞는’ 일이 적지 않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자. 그 속성은 의심이 있어야 들여다볼 수 있다. 지금 자신이 여기 있고, 손과 발이 있다는 것처럼 부인할 수 없는 것까지 의심하라는 것은 아니다. 방송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 길을 가다가 인상이 좋다며 다가오는 사람이 어떤 양면성을 가졌는지, 실시간으로 쏟아져 나오는 언론들의 진실은 무엇인지 우리는 집요하게 의심해야 한다.

우다영 (작곡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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