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술 > 기획
오리엔탈리즘, 편견으로 일그러진 동양의 초상화
김지연·서가영 기자  |  smpkjy93@sm.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9.1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아직까지 ‘동양인’ 하면 쫙 찢어진 눈매와 낮은 코, 그리고 작은 체구를 떠올리는 서양인들이 많을 것이다. 또한 기모노를 입고 전통 부채를 펼친 채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는 일본 여성의 모습을 쉽게 떠올리기도 한다. 이처럼 동양 하면 연상되는 전통적인 이미지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으로부터 비롯됐다.

본래 ‘동양의’라는 뜻을 지닌 단어 ‘오리엔탈(Oriental)’은 종종 현대사회에서 동양에 대한 선입견을 나타내는 단어로 왜곡돼 쓰이고 있다. 동양적인 외모를 가지고 세련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 모델을 신비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로 표현한 의류 광고, 은은한 조명 아래의 여성이 동양 국가의 전통의상을 입고 유혹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는 악세사리(Accessory) 광고. 이 두 광고에서는 공통적으로 ‘오리엔탈 풍’ ‘오리엔탈 무드(Mood)’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오리엔탈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양의 신비스러운 이미지는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일상의 곳곳에 침투해있는 오리엔탈리즘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오리엔탈리즘, ‘생산된’ 동양의 모습
오리엔탈리즘은 어원 ‘오리엔트(Orient)’에서 기원했다. 라틴어 오리엔트는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을 뜻하는 단어로 동양의 고대문명에 영향을 받은 유럽인들이 지은 것이다. 이후 시대가 흐를수록 점점 의미가 확대돼 근대에 이르러서는 서양인들이 지중해를 기준으로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동쪽의 나라를 부르는 단어로 사용됐다.

‘오리엔탈리즘’은 오리엔트에 사상을 뜻하는 접미사 ‘ism’이 결합된 말로, 간단히 말하면 ‘서양이 생각하는 동양’이다. 즉 서양이 스스로 주체가 돼 객체인 동양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Image)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1978년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책 「오리엔탈리즘」이 나오기 전까지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동양에 대한 서양의 관심을 의미했다. 이주은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유럽인들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일찍이 동양의 이국적인 정서에 관심을 가졌다”며 “15세기에 해양로를 개척하면서 본격적으로 동양과 교류해 동양의 문물을 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해양로는 중국에서 시작해 중앙아시아를 지나 로마까지의 동서양을 연결해주던 바닷길로 이를 통해 국제 상인들은 동서양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무역활동을 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다수의 서양인들은 소수의 서양의 탐험가나 선교사들, 혹은 상인들로부터 동양에 관한 문물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동양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전해져 동양에 대한 선입견이 만들어졌다.

서양이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규정하고 해석하는 틀’로 이용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유럽 제국주의가 태동하면서부터이다. 서양국은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을 착취하기 위한 정치적인 수단으로 사용했다. 이 교수는 “당시 산업혁명을 통해 기술과 자본을 축적한 유럽 열강들은 제국주의를 내세워 동양권 국가들을 식민 지배하기 시작했다”며 “서양은 동양을 무지하고 미개한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했다”고 말했다. 서양은 동양을 서구에 비해 열등한 이미지로 그려냄으로써 식민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찾은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오리엔탈리즘을 도구 삼아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일본은 1853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되면서 제국주의 당시 서양이 사용했던 식민지배 방식을 모방했다. 이 교수는 “일본은 합리성과 비이성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타자인 우리나라를 열등하고 무지한 존재로 바라봤다”며 “이런 우리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명목 하에 주권침탈을 했다”고 말했다.


고전 속에 드러난, 객체로서의 동양
오늘날과 같이 오리엔탈리즘의 의미가 ‘서양이 동양에 가지는 왜곡된 인식’을 뜻하게 된 데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문학 비평가이자 비교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이집트 카이로에서 팔레스타인의 부유한 사업가이자 미국 시민권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덕분에 그는 아랍권 문화와 영어권 문화를 모두 익힐 수 있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그의 성장배경은 「오리엔탈리즘」을 탄생시켰다. 「오리엔탈리즘」에서는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하고 폄하함으로써 그 반대편에 있는 서양을 우월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서구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을 위해 오리엔탈리즘이 이용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에드워드 사이드는 서구가 자신들을 계몽주의적인 주체로 정의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동양을 비합리적이고 미개하며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타자로 소외시켰다”고 말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발간이래부터 지금까지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으로 인해 기존에 오리엔탈이라는 이름이 붙은 동양 관련 학과의 이름이 바뀌었다. 2009년 뉴욕 주에서는 모든 법, 심지어 공문서 상에서조차 오리엔탈이라는 용어를 삭제토록 조치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아랍세계로 국한시켰다는 점에서 일부 비판도 있지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유에는 아직까지 극복해야 할 오리엔탈리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문화에 깃든 오리엔탈리즘, 편견을 깨기 위한 과제는
오리엔탈리즘은 근대에 태동한 오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의 오페라 <나비부인>은 미국 해군 장교인 ‘핑커톤(Pinkerton)’과 결혼해 한 평생 남편만을 기다리다 순절하는 일본인 게이샤 ‘나비부인’에 대한 이야기다. 남편을 위해 평생을 바친 나비부인의 모습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서양인의 관점에서 그려낸 순종적인 여성상을 나타내고 있다.

비단 근대의 얘기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대중문화만 보더라도 오리엔탈리즘의 흔적이 남아있다. 미국영화 속에서 아시아인을 유순하고 말수가 적은 배역이나 북한공작원과 같은 배역으로 한정시키는 것도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리엔탈리즘이 대중문화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오리엔탈리즘이 동양권이 아닌 관객이나 소비자에게 호소하기 위한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예로는 영화 <올드보이>를 들 수 있다. 올드보이는 제57회 칸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할 만큼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영화다. 하지만 서양 영화계에서는 올드보이라고 하면 올드보이의 한 장면이었던 생 낙지를 씹어 먹는 장면만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은 다른 아시아 영화에도 영향을 줬다.

동양권이 아닌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양의 이국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 오리엔탈리즘 요소가 생기기도 한다. 본교 박인찬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서양에서는 동양의 이국적인 향취를 소재로 삼은 작품을 우선적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특히 동양 문화가 서양 문화에 진입할 때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에까지 뻗친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선 동양의 경험과 이미지를 다양하게 표현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박 교수는 “한국의 경험과 이미지를 다양하게 표현하려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상투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서구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력 아래 우리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다른 국가들에게 오리엔탈리즘과 똑같은 편견, 선입견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성이 있다. 박 교수는 “우리 스스로가 일종의 문화적 강자로서 다른 국가와 국민, 이주민, 노동자들을 일반화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리엔탈리즘은 그 영향력 아래 있는 문화권의 참모습은 가린 채, 왜곡된 이미지를 생산한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은 시대를 막론하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왔다. 역사적으로 서양은 그들만의 잣대로 동양을 판단했으며 동양 국가는 또 다른 동양 국가를 왜곡하기도 했다.

우리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우리의 참모습을 외부에 보여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외부에서 만들어 놓은 가짜의 탈은 벗어 던져, 그 안에 있는 진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세상에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김지연·서가영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김명국의 달마도
2
가해자 처벌을 위한 학우들의 발걸음
3
콜라보레이션, 하나의 상품에 두 가지의 특색을 담다
4
공자와 마음의 행복
5
중앙도서관에 외부인 침입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발행인 : 강정애 | 편집인 겸 주간 : 강미은 | 편집장 : 하재림 | 발행처 : 숙명여자대학교|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정애
우)140-742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로 47길 100 숙명여자대학교 숙대신보사
행정실 ☎ 710-9150 (Fax) 706-2695 / 편집실 ☎ 710-9721 / 9152
Copyright © 2017 숙대신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mnews@sookmy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