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민주화에 대한 갈망, 끝내 찾아온 봄
이지원 기자  |  smpljw91@sm.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5.15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1980년 5월 20일(화), 택시기사 A 씨는 늦은 오후 집을 나섰다. 아내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A 씨를 쳐다봤지만 A 씨는 결연한 표정으로 택시를 몰고 서둘러 무등경기장으로 향했다.

무등경기장에 도착하니 많은 택시와 대형 버스들이 줄지어 행진하며 시위하고 있었다. A 씨는 시위대에 가담했다. 밤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공수부대는 집단발포를 하며 위협을 가했지만 시민들은 멈추지 않았다. A 씨는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있었다.
 
봄이 오지 않던 1980년 5월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이후 국민들은 독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화가 실현되리라는 기대에 차올랐다. 매섭던 독재의 겨울을 지나 드디어 ‘서울의 봄’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1979년 12월 12일(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격렬해졌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학생운동과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됐다. 기세를 몰아 1980년 5월에는 전국의 학생 연대가 서울역에서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이를 문제 삼아 17일(토)에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다음날 전남대학교 교문 앞, ‘5·17비상계엄확대조치’로 교내 출입이 차단된 학생들과 무장한 공수부대원의 충돌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분노한 광주(현 광주광역시) 시민들은 신군부 세력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라남도 도청 앞으로 이동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시작이었다. 투입된 공수부대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시위 진압이 과격해질수록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시위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 MBC와 노동청, 세무서 등을 불태웠다. 정문영 5·18 기념재단 연구실장은 “5·18  민주화운동은 신군부 세력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광주 시민이 분노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정부는 광주를 고립시켰다. 다른 지역과 광주를 오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광주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언론 보도가 규제됐기 때문에 광주 지역 밖에서는 광주의 상황을 알 수도 없었다.

21일(수)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시위대가 화순에 있는 경찰의 무기고 등을 탈취하며 시위는 무력항쟁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시민들이 갖게 된 무기는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광주 시민은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자 열흘간 항쟁을 지속했다.

결국 열흘에 걸친 5·18 민주화운동은 27일(화) 새벽, 탱크 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무력진압으로 끝이 났다. 수많은 시민들이 연행되고 사망자 193명을 포함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였다.

오늘의 ‘봄’을 이끈 5·18 민주화운동
5·18 민주화운동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5·18 민중항쟁’ ‘5·18 광주학살’ ‘5·18’ 등이 5·18 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 실장은 “5·18 민주화운동은 복합적인 사건이다”며 “계엄군의 학살과 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 동시에 이뤄졌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어 “각각의 명칭은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덧붙였다. 5·18 민중항쟁이라는 명칭은 민중이 중심이 됐다는 것을 강조할 때, 광주학살은 광주 시민이 학살됐음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기엔 5·18 민주화운동을 ‘무장폭동’ ‘난동’ ‘광주사태’라고 불렀다. 시위자들을 ‘폭도’ ‘불순인물’ ‘북한간첩’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갖게 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명칭인 ‘5·18 민주화운동’은 김대중 전 대통령 때 규정된 것이다. ‘광주’라는 지역명이 표현에서 삭제된 이유는 민주화운동이 광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진행됐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다. 정 실장은 “5·18 민주화운동의 복합성을 표현하기 어려울 땐 5·18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며 “여러 명칭이 있지만 5·18 기념재단 연구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은 5.18 민주화운동이다”고 말했다. 현재 5·18 민주화운동에서 벌어진 범법행위의 공소시효는 만료됐다. 정 실장은 “그간의 진상조사로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며 “이에 대한 조사가 다시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정 실장은 “5·18 민주화운동의 의의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서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시발점이라는 데 있다”며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가?’라는 의문을 가진 물음의 시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쟁취한 것이다. 정 실장은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전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룰 수 있었다”며 “우리에게 과거의 역사가 진정한 의미를 지닌 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그날의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1년이 지난 2011년 5월,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은 대한민국과 주변국의 민주화를 이끈 공헌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정 실장은 “대한민국은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며 “5.18 민주화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화), 제19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그날 우리가 행사했던 한 표 역시 과거 세대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잊고 살아갈 때가 있다. 모든 순간에 우리는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그날의 기억 속으로
추천 도서

   
 

소년이 온다
한강
창비, 216쪽
1만 2000원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를 묘사한 한강(여·48)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희생자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는 소설이다. 각 장마다 달라지는 서술자는 누군가를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보며 시선을 움직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서술자인 ‘죽은 시체’ 혹은 ‘피해자’는 자신의 친구를, 함께 고문받은 동료를, 도청 안에서 시민군을 돕던 친구의 누나를 죄책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서술자는 피해자가 죽은 후 장례식과 같은 충분한 애도를 하지 못했다. 슬픔을 털어낼 기간이 없었던 것이다. 작가는 ‘피해자의 삶’을 슬픔을 해소하지 못한 ‘장례식’이라고 표현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어땠는가. 시민들은 절망 속에서 총을 들었지만 다가올 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산처럼 쌓인 시체 속 ‘한 사람’이 됐다. 한강의 소설은 피해자 개인에 주목한다. 개인에게 닥친 비극과 그들이 느끼는 아픔을 독자에게 전하고자 한 것이다.

4장의 ‘나’는 구치소에서 고문받다 사망한 사람을 향한 죄책감을 가지고 한평생 살아간다. 그로부터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나’는 5·18 민주화운동 연구자와의 구술 인터뷰 도중 비극으로부터 탈출하지 못했음을 털어놓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1980년으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 우리도 여전히 그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달 5일(금),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그는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하며 시위 진압에 대한 군 개입을 정당화했다. 또한 시민군이 무기고를 탈취한 점 등을 이유로 당시의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상처 입은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문선희
난다, 175쪽
1만 8800원

대다수의 사람들이 역사적인 기록에 대해 논문과 같은 딱딱한 형식의 글을 떠올릴 것이다. 여기 그 시절을 눈과 귀, 몸으로 경험한 누군가의 5·18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책이 있다. 바로 문선희(여·40) 작가의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담벼락에 묻힌 5월 광주」다. 문 작가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80명을 인터뷰해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 시절의 광주를 그렸다.

시민군에게 자동차를 내어주던 아시아자동차, 주먹밥을 만들어 전해준 아주머니들은 이들의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내용이다. 평범한 시민이었던 시민군이 열흘간 공수부대와 맞설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의지하며 도왔기 때문이다.

김옥희(여·48) 씨는 동네에서도 사납다고 유명한, 일명 ‘인간 말종’이라고 불리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수 노릇을 하고 집에 노름판까지 벌였다. 어느 날 김 씨는 할머니가 데모하던 대학생을 집에 숨겨주는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는 “훌륭한 일을 하는 데 보태 쓰라”고 말하며 대학생의 손에 쌈짓돈을 쥐여 주기도 했다. 그간 알던 할머니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를 기억하며 주변 인물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진하(여·48) 씨는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해 아버지와 헤어졌다. 광주가 고립되면서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오 씨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오빠의 손을 잡고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도청에 드나들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5·18 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오 씨는 “나와 고작 한 살 차이의 오빠가 두려움을 숨기고 아버지의 시신을 찾겠다고 도청을 돌아다녔을 생각을 하니 안쓰러웠다”고 말했다.

한편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 담벼락에 묻힌 5월 광주」 속에 담긴 사진은 서울특별시청 시민청 갤러리에서 사진전(이하 사진전)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전은 지난 12일(금)부터 오는 19일(금)까지 개최된다. 사진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커지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정과 왜곡으로부터 5·18민주화운동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단법인 광주학교가 주최했다.

신간 안내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창비, 608쪽
2만 8000원

“5월은 끝난 게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1985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한 작가의 책을 찾아 읽었다. 진실을 좇는 사람들에게 등불이 돼 준 황석영 작가의 저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전면증보판이 15일(월) 출간됐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항쟁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등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전면증보판에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군사작전 내용과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의 증언 등 새로운 자료가 더해졌다. 또한 5·18 민주화운동 관련된 재판의 결과를 반영해 항쟁의 역사적·법률적 성격을 규명했다.

당시 검열도서였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많은 사람들이 복사본으로 읽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읽었던 만큼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지원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최근인기기사
1
김명국의 달마도
2
가해자 처벌을 위한 학우들의 발걸음
3
콜라보레이션, 하나의 상품에 두 가지의 특색을 담다
4
공자와 마음의 행복
5
중앙도서관에 외부인 침입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이메일무단수집거부
발행인 : 강정애 | 편집인 겸 주간 : 강미은 | 편집장 : 하재림 | 발행처 : 숙명여자대학교|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정애
우)140-742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로 47길 100 숙명여자대학교 숙대신보사
행정실 ☎ 710-9150 (Fax) 706-2695 / 편집실 ☎ 710-9721 / 9152
Copyright © 2017 숙대신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mnews@sookmy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