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숙케치]

 

작년 몹시 추웠던 어느 날, 나는 수능특강의 작품을 정리한 어떤 자료를 보고 있었다. 스프링으로 된 두꺼운 자료 속에는 내가 사랑하는 작품들 사이사이에 외워야 할 핵심 정보들이 끼워져 있었고 그런 것들을 계속 지켜보는 일에 점점 신물이 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예전에 보충 시간에 들었던 옛날 여행기가 생각났다. 기행문은 읽기 어려지 않아 아껴두고 있었기에 지루하다고 느낄 때 펼쳐보기 좋았다. 나랑 여행 스타일이 비슷할까 생각하며 의유당 남 씨의 동명일기를 읽어 내렸다.

하인들을 대동하고 떡국을 쑤는 그녀. 가끔씩 초조해하며 질문을 하는 그녀. 냉소하며 가버리는 다른 사람들 뒤에 남아 기다리는 그녀. 이 모든 행동은 오르지 해를 보기 위한 것들이었다. 그런 소박하고도 끈질긴 의유당 남 씨가 사랑스러웠다. 나는 결심했다. 나도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다고. 꼭 수능이 끝나면 겨울 해를 보자고. 그리고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합격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떠났다. 부산에서 떠오르는 2016년의 마지막 해는 내가 보아야 했다. 의유당의 글이 내게 남긴 어떤 것, 이를테면 그녀의 사랑스러운 끈질김을 닮고 싶다는 어떤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녀는 하인들을 대동했지만 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여행했다. 기차표는 할아버지가 예매하셨고 여행 계획은 나와 할머니가 아주 오래전, 깊은 밤에 세운 거였다. 거창할 것도 없었고, 아주 편한 것도 아니었다. 여행 초반에 할아버지, 나, 할머니는 서로 어긋나기도 했다. 좋아하는 음식들이 다르고, 세대도 다르고, 여행에 대한 생각도 달랐다. 십수 년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랑 살았던 경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여행지에선 서로 다름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행 둘째 날, 드디어 해를 보기로 한 아침이 됐을 때, 나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할머니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나를 깨우고, 그 소리에 할아버지도 일어났을 때, 그리고 셋이 나란히 호텔 창밖으로 해를 보려고 고개를 내밀 때, 나는 그때까지의 모든 어긋남이 아물고 금들이 붙는 걸 느꼈다. 내가 본 해는 의유당이 본 해만큼 빨갛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내가 의유당보다 더 멋진 해를 감상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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