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학생, ㅇㅇㅇ가 어디 쪽이야?” 다소 투박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의 남성이 대뜸 필자를 불러 세웠다. “아, 이쪽으로 쭉 가셔서 좌회전하시면 돼요” “가깝네. 고마워!” 슬쩍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사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한민국에서 20대의 여성이라는 지위로 살아가면서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문득 반말을 듣는 경험을 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처음에는 무감각했고, 다음에는 몹시 불쾌해하며 매번 싫은 내색을 비췄다. 이젠 또다시 무감각해졌다. 그들을 이해하게 됐다기보다, 방관적 태도가 선사하는 심리적 안정감에 적응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사회는 ‘나이’라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잣대로 젊은이를 하대했다. 누군가에게 원치 않은 충고를 건네는 나이든 이들은 ‘꼰대’라는 비아냥 조의 용어로 정의 내렸다.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불만과 분노를 한껏 담은 ‘꼰대’의 틀 속에 분류된 이들은 그렇게 사회 속에서 불필요한 존재로 분류되고 존중받지 못할 위치로 재설정된 것이다.

젊은 세대가 ‘꼰대’라는 단어를 화두로 기성세대에 날 선 화살을 거닐 때, 기성세대라고 가만히 손 놓고 바라만 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요즘 애들’이라는 익숙한 호칭을 통해 청년세대에 대한 비난과 체념을 드러냄으로써 당위성을 확립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렇듯 ‘꼰대’와 ‘요즘 애들’이라는 형태로 서로를 규정하고 타자화하는 세대 간 화법은 세대갈등을 무르익게 하는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한다.

청년들이 직면한 현실 문제를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아리송한 명제로 귀결시켜 본인들의 ‘청춘’을 둘러싼 감성적 담론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꼰대들과, 기성세대의 경험치와 노하우를 ‘꼰대의 추억’ 쯤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요즘 애들이 함께 이루어나가는 사회는 사뭇 끔찍하다. 더 이상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도, 설득하지도 않는다. 필자가 중년의 남성에게 그랬듯, 그저 각자가 정해 놓은 틀 속에 상대를 분류시킨 뒤 가차 없이 외면한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면이 아닌 다가섬이다. 세대갈등에 관해서 필연적으로 ‘소통의 부재’라는 다소 진부한 원인을 말할 수밖에 없다. 집단의 공감대에 스며들지 못한 타인의 목소리를 매섭게 객지로 내몰기보다 귀 기울이고 서로 함께 호흡하고자 할 때 비로소 ‘인정할 수 있는 꼰대’와 ‘인정할 수 있는 요즘 애들의 시대’가 대두될 것이다.

홍가연(법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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