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민지 기자>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 이하 SNS)를 통해 ‘실어증입니다, 일하기싫어증’ ‘아, 보람 따위 됐으니 야근수당이나 주세요’라는 그림 에세이가 현대인의 공감을 사고 있다. 직장인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대변해주는 문구와 그림이 재치있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작품을 그린 사람은 바로 ‘그림왕 양치기’ 양경수(남·34) 작가다.

KBS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김과장’에 중간중간 등장하는 삽화들 또한 양 작가의 작품이다. 적절한 순간에 등장해 창의적인 문구로 공감을 자아내는 그림들은 드라마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양 작가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본지는 양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나볼 수 있었다.

양 작가, 현대인 마음에 약을 발라주다
양 작가는 불교 예술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내는 미술인이자 힘든 직장인의 삶을 익살스러운 한 컷의 그림으로 나타내는 만화가다. 양 작가는 SNS에 그림왕 양치기라는 예명으로 자신의 그림을 올린다. 거짓말쟁이를 뜻하는 것처럼 보이는 ‘양치기’라는 말은 사실 자신의 성 ‘양’에 ‘다스릴 치(治)’ ‘자기 기(己)’를 더해 ‘나 자신을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의적인 표현을 통한 언어유희를 즐기는 양 작가를 잘 보여주는 단어다.

양 작가의 재치는 ‘약치기 그림’ 시리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번 해엔 게으르게 누워있었으니 다음 해엔 부지런히 누워있어야지’ ‘어릴 땐 동자, 지금은 노동자’ ‘야근이 로또라면 난 이미 억만장자’ 등 양 작가의 그림 속에는 직장인들의 고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켜 표현돼 있다. 그림에 항상 단어의 운을 맞춰 라임(Rhyme)을 이용한 문구를 넣는 양 작가는 “워낙 말장난을 좋아해요”라며 “언어유희의 문구들은 힙합의 펀치라인(Punchline)에서 착안했죠”라고 익살스럽게 말했다.

양 작가는 가족들이 모두 불교미술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미술을 접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꾸준히 그림을 그려왔다는 양 작가는 흥미를 좇아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양 작가가 서양화과에 진학해 졸업할 때까지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진로에 대한 아버지의 반대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당시에는 학비뿐만 아니라 집세, 물값과 같은 기본적인 생계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어요” 부모님의 지원이 끊기자 양 작가는 스스로 모든 생활비용을 충당해야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그림을 그려 돈을 버는 것은 쉽지 않았다. 벽화 그리기와 같은 일을 하던 중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양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양 작가는 “노점상을 열어 사람들의 귀를 뚫어주기도 하고 클럽이나 바에서 일하기도 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양 작가의 그림
생계유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대학교를 자퇴하고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을 위해 사람들과 많이 만났던 양 작가는 “24살에 동대문 도매시장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했어요”라며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항상 정장을 입고 뿔테 안경을 썼죠”라고 이야기했다. 사업을 하던 양 작가는 한국 사회의 특성상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사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그는 2012년에 추계예술대학교를 졸업했다. 양 작가는 “다시 대학을 다닌 것이 어린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가 됐어요”라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타인의 이야기에 더욱 귀 기울이는 계기가 됐죠”라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 양 작가는 본격적으로 미술인으로서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곧 양 작가는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서양화에 회의감을 느꼈다. 작품 속에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부재해 본인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나 피카소처럼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화가가 될 수 없다면, 스스로를 알리는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양 작가는 붓을 잠시 내려놓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양 작가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택한 장르는 ‘웹툰(Webtoon)’이었다. 그가 그린 웹툰이 점차 유명세를 타자, 양 작가는 포털사이트 ‘네이버(NAVER)’ 측의 정식 연재 제의를 받았다. 그 후 양 작가는 2016년 11월부터 네이버에 ‘잡다한컷(Job多한컷)’이라는 제목으로 현재까지 웹툰을 연재하고 있다. 잡다한컷은 승무원, 소방관, 간호사 등 다양한 직종에서 종사하는 직장인의 애환을 한 컷의 그림으로 담아낸 웹툰이다. 양 작가는 “승무원 한 분이 만화를 보고 소방관이셨던 자신의 아버지가 생각난다며 연락을 해왔을 때 보람을 느꼈죠”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가 그리는 여러 직업들의 현실적인 모습과 유쾌한 문구는 웹툰을 보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양 작가가 여러 직업군을 예리하게 묘사할 수 있는 비결은 그의 노력에 있었다. 양 작가는 각 직업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항상 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과 인터뷰를 한다. 그는 “사람들은 의외로 무엇이 가장 힘드냐는 질문에 잘 대답하지 못해요”라며 “항상 하는 일이라 습관처럼 익숙해진 탓에 힘든 점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거죠”라고 말했다. 항상 주변을 관찰하는 그의 습관도 직장인들의 애환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양 작가는 “평소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이 하는 일을 유심히 봐요”라며 “그것이 직업의 특징을 잡아낼 때 도움이 된 것 같아요”라고 덧붙였다.
 

부처의 생애, 양 작가의 그림에 담기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직장인의 애환을 담아낸 만화를 그리지만 양 작가는 불교미술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의 삶을 되돌아보다 자신의 정체성은 불교에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불교의 철학이 양 작가 본인의 가치관과 비슷한 것 또한 하나의 이유였다. 양 작가는 “부처를 영웅처럼 생각하고 있어요”라며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영웅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양 작가는 ‘히어로(Hero)’라는 주제로 부처와 부처의 십대제자(十大弟子)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기도 했다.

개성 있는 불교미술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은 양 작가는 네덜란드 국립 세계문화 박물관에서 개최된 ‘더 붓다(The Buddha)’전에 초청됐다. 부처의 생애를 현대의 관점에서 독특하게 풀어낸 작가는 양 작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더 붓다전은 해외 주요 언론들의 관심이 집중된 전시회였다. 전시회에 초대된 현대미술작가는 일본의 유명 만화가 ‘데츠카 오사무’와 양 작가뿐이었다. 양 작가는 “한국 작가로서 이런 전시회에 초청받은 것은 국가적인 자랑인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뿌듯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는 문화콘텐츠 홍보에 대한 지원을 해주지 않았어요”라며 “자국의 문화를 알리기에 바쁜 일본, 중국의 모습과 비교돼 씁쓸했죠”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림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은 양 작가
양 작가의 그림이 인기를 끌면서 그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순전히 자신의 노력만으로 돈을 벌 수 있어 기쁘지만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의미가 있을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양 작가로 하여금 돈을 버는 것만큼 잘 쓰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양 작가는 “돈을 벌 때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려해봐야 해요”라며 “돈은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할 때 가치 있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고민 끝에 양 작가는 성실하고 특색 있는 후배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임 ‘양치기 해적단’을 만들었다. 양치기 해적단은 모임 구성원이 페이스북(Facebook)에 자신의 그림을 연재하면 그 그림에 대한 원고료가 지급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양 작가는 “명품 시계, 차 등을 구매했을 때의 행복은 잠시일 뿐이에요”라며 “양치기 해적단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후배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어 뿌듯하죠”라고 말했다.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통해 미술인이자 만화가로서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양 작가는 최근 청춘을 위한 강연을 하고 있다. 양 작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게 일정 기간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직업의 정의예요”라며 “하지만 요즘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찾는 일은 하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경력을 쌓고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공부만을 하는 학생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양 작가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힘들 때조차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자신만의 색을 지닌 개성 있는 작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양 작가는 “자기 자신을 찾기에도 시간이 아까워요”라며 “시간은 돈이 많은 사람도 잘생긴 사람도 평등하게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쓰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죠”라고 강조했다.


양 작가는 사람들에게 작가로서의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SNS에 그림을 올릴 뿐 아니라 그림 에세이를 만드는 등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작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양 작가는 “갤러리 전시만 할 수 있던 이전에 비해 오늘날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작가의 꿈을 이룰 수 있어요”라며 “작가로서 자신만의 색을 찾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원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죠”라고 조언했다.

그림 속에서 자신을 찾은 양 작가는 오늘도 타인의 감정을 속 시원하게 묘사해주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인 그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하다.

▲ 그림왕 양치기 활동 중인 양경수 작가의 약치기 그림들이다. 직장인들의 애환을 재치있게 그려낸 약치기 그림은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가며 사람들의 큰 공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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