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달자(국문 65졸) 동문


프랑스 작가 볼테르는 ‘시의 한 가지 장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산문보다 적은 말로써 더 많은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함축적인 언어로 다른 이들을 공감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따뜻한 글로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는 시인이 있으니 바로 신달자 동문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글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신 동문이 바라본 세상과 그의 삶을 따라가 보자.

시인, 가장 명예스러운 이름


신 동문은 『오래 말하는 사이』『이제야 너희를 만났다』와 같은 시집뿐 아니라,『물 위를 걷는 여자』『사랑은 독이 있다』같은 소설,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고백』과 같은 에세이집도 출간했다. 신 동문 본인은 ‘시인 신달자’라는 이름이 가장 명예스럽고 또 가장 충실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재미있고, 에세이는 편안하게 얘기하면서 독자들과 정신적인 교류를 느낄 수 있는데 매력이 있지. 시는……. 어렵긴 하지만 우리 문학에서 으뜸이야.”


시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가득한 신 동문은 자연스럽게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중학교 시절, 누구나 앓는 ‘여러 가지가 되고 싶은 병’에 걸렸다. 무용을 배우고, 영화배우를 꿈꾸던 그는 좋아하는 이성이 생기면서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음을 전할 방법으로 편지를 택한 것이다. “그 때 친구 오빠가 국어국문학과였는데 친구한테 새 고무신을 주고 친구 오빠의 시집을 빌려봤어.” 그는 당시 김소월의 시를 몇 번이고 옮겨적었고, 여러 통의 편지에 시를 썼다. “쑥스러워 편지를 전해주지는 못했지만, 그 때부터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됐지.” 이후, 고등학교 2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을 간 신 동문은 학교 대표로 경남 백일장에 나가 1등을 차지했다. 그 경력으로 우리 학교 국어국문과에 합격했고 본격적으로 문학공부를 시작했다. 신 동문은 1972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 문학』에 등단하면서 작가가 됐다.


신 동문의 글은 유독 사람들의 많은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의 작품에는 온유하고 다정한 문체와 진솔한 경험이 잘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전달하고 싶은 절박한 것부터 얘기하다 보니 자연히 글 속에 삶이 배어난다고 말한다. “문학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첫 번째 기능은 본인이 ‘아파.’라고 말하는 것이야. 살아오면서 겪었던 가장 힘들었던 것을 쓰고 싶었지.” 본인의 인생이 녹아있는 글, 그 속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바로 ‘사랑’과 ‘가족’이다.

사랑과 가족, 내 문학의 테마


“나는 늘 사랑을 하는 쪽이야. 남자를 딱 차버리지도 못하고 늘 저자세야. 생각해 보면 인생도 그랬던 것 같아.” 그는 사랑을 할 때에도 손해를 보는 편이라 조금은 억울하다고 웃으며 말한다. 그러나 이내 “저자세였기 때문에 올라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살았을 거야. 내가 성공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득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라고 한다. “사랑이라는 테마가 어떤 것인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 그래서 계속 하는 거지. 인연이니 뭐니 하지만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내가 정말 좋아했다’는 사실이야.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가짜로 사는 거잖아.”


그의 글에는 사랑뿐 아니라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의 어머니는 ‘달자야,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라, 돈도 벌어라, 행복한 여자가 되어라.’라는 세 가지를 늘 당부했다. “그 말은 어머니가 1959년도에 처음 했어. 내 어머니는 못 배운 분이셨지만 슬기로운 면이 있었어. 그런데 난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딴 짓만 하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세 가지를 다 이뤘지…….”


신 동문은 초ㆍ중ㆍ고 시절을 부유하게 보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할 때 쯤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져 새벽 2시에 살던 집을 떠나 이사를 해야 했다. 그는 집을 떠나며 ‘반드시 돈을 벌어서 다시 어머니께 이 집을 사주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어머니 생전에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어머니는 내가 가장 나쁜 여건일 때 돌아가셨거든. 나한테 걸었던 기대를 하나도 보지 못하고 가셨어.”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신 동문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야 대학원에 진학했고, 책을 통해 번 돈을 어머니 무덤에 묻을 수 있었다.

숙명, 내 문학인생의 반쪽


우리 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신 동문은 ‘숙명여대’하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아유, 숙대는 뭐 많지.”라며 반색한다. “공덕동, 청파동, 효창동이 나와 친구들의 활동무대였어.” 신 동문은 4년의 학사과정, 3년의 조교 생활, 이후 10년의 강사 생활까지 총 17년을 우리 학교에서 보냈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보낸 긴 시간만큼이나 떠오르는 추억도 많은 것이다. “청파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뜨끔뜨끔해. 거기서 사랑도 해보고, 실연도 당해보고, 희망도 가져보고, 깨져보기도 하고……. 뭐든지 인생의 첫 번째는 거기서 이뤄지지 않았을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매년 가을마다 열렸던 ‘문학의 밤’ 행사이다. 당시의 문학의 밤은 참여한 사람들이 우리 학교 대강당을 채우고 마당까지 늘어설 정도로 굉장한 인기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문학의 밤은 시 낭송도 하고 학생들이 문학에 대한 토론도 하던 행사였다. 신 동문은 이 행사가 자신에게 문학의 혼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박목월, 서정주, 김남조 등 당대 최고의 시인들도 우리 학교 문학의 밤에서 만나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다. “그 때 서울에서 문학의 밤이 가장 성황리에 끝난 곳이 우리 학교였어.”


여대생 시절을 회상하며 꿈꾸듯 말을 이어가던 신 동문은 이렇게 말한다. “아마 숙명이라는 이름은 내가 죽어도 내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야.”


“엄마들은 그런 생각을 해. 자기 딸들이 어디가서든 대접받았으면 좋겠다.” 이는 그가 숙명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선 대접받을만한 명분이 있어야지.” 그가 말하는 ‘대접받을만한 사람’이란 ‘자기의 단점을 잘 극복한 사람’이다. “사과는 어디에 열리느냐에 따라 오천 원짜리가 되기도 하고, 천 원에 다섯 개 짜리가 되기도 해. 그건 운명이야. 인간은 달라. 천 원에 다섯 개 짜리로 태어나도 오천 원 짜리가 될 여력이 있어. 자기를 갱신하면 돼.”라고 말한다.


“의식이 흐르고 있는 한 쓰는 것을 멈추면 안돼.”라는 생각으로 24시간 시를 쓴다는 신 동문. 꺼지지 않는 열정을 지닌 그의 계획은 오직 ‘좋은 시를 쓰는 것’이다. 시인의 맑은 눈으로 본 세상은 또 어떤 글귀로 표현될지. 벌써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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