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학교 밖에서의 인문학 강연 등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을 통해 진정으로 사유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남산공원 옆에 위치한 깨봉빌딩의 2층과 3층에는 인문학을 배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공부 공동체’를 이뤄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학인(學人)이나 선생님으로 부른다.

책으로 삶을 공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본지는 지난달 8일(토)과 13일(목) 두 차례 깨봉빌딩의 공부 공동체를 찾아갔다. 건물 3층을 사용하는 ‘남산 강학원’에서는 동서양의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했다.

우리의 즐거운 배움터
공부 공동체가 모여 각자 공부 모임을 조직해 운영되는 남산 강학원.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30부터는 ‘대중지성’ 프로그램 중 ‘글쓰기 강학원 2학년’ 과정이 진행된다. 8일에도 일찍부터 학인들이 모여 공부 시간에 사용될 간식 등을 분주히 준비하고 있었다. 남산 강학원의 공동체 일원인 강병철(남·31세) 씨로부터 남산 강학원을 소개 받았다.

“남산 강학원은 두 개의 세미나실과 공부방, 주방, 세척실 등으로 구성돼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고 있어요” 세미나실은 글쓰기 강학원이나 초청 강연 등에 사용된다. 글쓰기 강학원은 가장 넓은 세미나실에서 열린다. 세미나실은 앉은뱅이책상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공립도서관의 독서실처럼 꾸며진 공부방에서는 책을 읽고 있는 학인들이 있었다.

남산 강학원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식탁이었다. 식탁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부착돼 있었다. 책상으로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강 씨는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자기가 사용한 물품은 자기가 정돈하는 것이 원칙이죠”라고 말했다.

한편 남산 강학원에서는 상주하며 공부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매니저(manager)’로 활동해 역할을 분담하기도 한다. 매니저가 되면 소정의 급료를 받지만 남산 강학원의 직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맡아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 씨 또한 공동체의 식사 준비를 돕고 관리하는 주방 매니저로도 활동하고 있다. 

주방에서는 학인들이 점심, 저녁을 공동체가 일손과 재료를 모아 준비한다. 2,500원을 내면 밥을 먹을 수 있다. 자신이 사용한 그릇이나 컵 등은 세미나실 맞은편의 세척실에서 직접 닦고 제자리에 두는 것이 남산강학원의 규칙이다.

주방과 세척실 사이에는 카페처럼 꾸민 아기자기한 공간이 있는데, 서랍에 돈을 넣는 무인 방식으로 간식이나 커피를 살 수 있다. 이외에도 남산 강학원 곳곳에는 신문, 잡지 등 읽을거리가 곳곳에 배치돼 있다. 

우리가 설계하는 우리의 생각
3시 30분, 열여섯 명의 학인들이 남산강학원 세미나실에 모였다. 글쓰기 강학원의 1교시는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저서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의 일부 구절을 암송하는 시험으로 시작했다. 학인들은 암송할 학인을 제비뽑기로 정하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멋쩍은 듯한 목소리의 암송이 하나둘 이어지자 세미나실의 분위기가 이내 진지해졌다. 낭독 후에는 김지연(여·40) 씨의 발제가 이어졌다. 김 씨가 자신이 직접 쓴 발제문을 소리 내 읽은 후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학인들은 니체의 용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서로 의견을 나누었고 현대사회와 관련지어 논의하기도 했다.

▲ “이번 발제를 통해 퇴화나 결손도 자신을 진보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된다는 것을 배웠어요” 김지연(여·40)가 직접 쓴 발제문을 소리 내 읽고 있다. 세미나실에 둘러앉은 학인들이 진중한 태도로 공부에 임하고 있다.


한편 김 씨가 발제문을 읽을 때 글쓰기 강학원의 튜터를 맡은 학인 신근영(여·45) 씨가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신근영 씨는 세미나실에서 나와 혼자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읽고 있었다. 신근영 씨는 “글쓰기 강학원은 학인들이 수동적으로 튜터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사유를 펼치는 것을 공부 공동체에서 훈련하기 위한 모임이에요”라고 말했다.

글쓰기 강학원은 1교시에는 공부를 하고자 모인 학인들이 서로 자유롭게 생각을 나눈다. 6시 30분부터 이어지는 2교시에 튜터와 1교시에서 토론한 내용을 정리하고 책의 더 깊은 내용을 공부하는 방식이다. 3학년까지 운영되는 글쓰기 강학원은 각각 1학년에서 ‘읽기!’, 2학년에서 ‘사유하기!’, 3학년에서 ‘쓰기!’의 과정을 거친다. 글쓰기 강학원의 학인들은 주중의 직장생활과 주말의 공부를 병행하는 등 바쁘게 지내고 있다.

남산 강학원의 학인들은 글쓰기 강학원이 열리는 대중지성 이외에도 ‘열린 인문학’ ‘기획세미나’ ‘고전강독’ ‘십대인문학’ 등의 큰 프로그램 속에서 다양한 공부 모임을 자의적으로 구성해 함께 공부하고 있다. 

소통으로 채운 한 끼
세미나실에서 토론이 한창인 오후 5시 즈음, 조용하던 공부방에서도 말소리가 들렸다. 함께 약속한 청소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공부방에서 집중하던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비질을 하고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등 함께 움직였다. 신근영 씨도 읽던 책을 내려놓고 대걸레를 사용해 공부방을 청소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청소가 마무리될 무렵 저녁 식사도 끝마쳤다. 아래층 감이당에서 공부하던 학인들도 식사를 위해 남산 강학원에 모였다. 글쓰기 강학원의 학인들도 5시 30분이 되자 토론을 갈무리하고 세미나실 밖으로 나왔다. 열정적으로 토의에 임하던 안상헌(남·50) 씨도 주방으로 향했다. 안 씨는 직장을 쉬는 동안 인문학 공부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남산 강학원에 온 뒤 자신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느껴요”라며 “공동생활을 하며 같이 책을 읽는 경험을 하는 것이 좋아요”라고 말했다.

식사시간 내내 학인들 사이에는 활기찬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공부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일상에 대한 정다운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한편 세미나실에는 자리에 남아 책을 읽으며 생각을 검토하는 학인들도 남아 있었다. 자리에 남아 공부하던 신순아(여·51) 씨는 주 중에는 고등학교의 국어교사로 근무한다. 매주 주말마다 공부를 준비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보람도 크다. 신순아 씨는 “남산 강학원에서 학인들과 함께 공부하며 배운 것은 인터넷 연수 등의 방법으로 배우는 것보다 삶 속에 더 구체화돼요”라며 “교사로서도 학생들과 수업을 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늦은 저녁, 거리에 서늘한 밤공기가 내려앉았는데도 남산 강학원의 안쪽에서는 열정적인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소통하는 공부, 성장하는 지성
남산 강학원과 감이당은 고미숙 고전평론가(여·57)가 20여 년 전, 수유리의 연구실에 마련한 공부 공동체에서 시작했다. 처음 공부 공동체가 구성되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학인들의 인연이 이어져 오고 있다.

13일 다시 찾은 남산 강학원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다수의 강연과 저작을 대중에게 선보이며 활발히 활동하는 그녀는 “밥 먹고, 공부하고, 산책하고,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중년 백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고 평론가는 1997년 IMF 당시 교수 임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수직에 합격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합격하지 못할 때마다 자괴감을 느껴야 했고 한 해에 두 번 있는 면접을 준비하느라 원하는 공부를 할 시간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교수 임용을 과감하게 포기하게 됐죠” 

취직에 매진하는 대신 그녀는 수유리에 작은 연구실을 얻어 함께 공부할 사람을 모았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대학교 주변에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렇게 시작한 첫 공부공동체가 ‘수유 연구실’이었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학로로, 원남동으로, 용산으로 계속 이사했어요” 공부 공동체가 용산에 자리 잡았을 때는 300평에 달하는 공간을 사용할 정도로 비대해져 있었다. 지금의 남산 강학원과 감이당은 2012년 분화해 깨봉빌딩에 자리를 잡고 고전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 남산강학원에서 만난 고미숙 고전평론가(여·57). 남산강학원의 벽면에는 고 평론가가 낸 『낭송Q 시리즈』의 표지가 게시돼 있다. 고 평론가는 “책을 통해 독자를, 강의할 수 있는 현장을 만나 소통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남산 강학원은 학인 모두가 남녀노소, 학벌을 불문하고 타인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목표한다. 성과나 화폐 중심인 현대 사회에서 어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면 자존감을 회복하고 불안함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 평론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에 대해 의심하고 생각을 전환하고 또 이를 표현할 수 있어야 지성인이에요”라며 “대중 지성은 대중이 곧 지성이게 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자 오후 1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고 평론가는 곧 있을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남산 강학원을 나섰다.


각자 외따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모여 이룬 공부 공동체. 학인들은 남산 강학원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 대해 질문하고 생활하며 책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지성이란 함께 사유하는 것으로써 삶에 바투 다가왔다.

함께 배우고, 더불어 변하기 위해 공동체의 품으로 향하는 학인들의 발걸음이 오늘도 희망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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