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인기 만화 ‘심야식당’에는 하루 일과에 지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 식당이 등장한다. 늦은 밤 모든 사람이 귀가할 무렵 조용히 문을 여는 식당의 새벽 손님들은 모두 각각의 사연을 갖고 식당에 찾아온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식당의 주인장 ‘마스터’는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손님들이 원하면 메뉴판에 없는 음식까지 무엇이든 만들어준다. 피로해진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며 마음을 달래주는 심야식당, 일본 만화 속에서만 존재하던 그곳이 서울에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괴로운 날이면 찾아오게 되는 곳이에요”
위로가 필요할 때면 생각나는 쉼터

심야식당은 바쁜 하루를 보낸 뒤 늦은 밤이 돼서야 여유가 생기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늦은 시간에만 문을 여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하루 일과에 지친 사람들이 여유롭게 식사를 하며 힘든 마음을 위로받는다. 그렇기에 심야식당은 마음을 터놓으며 피로를 풀 수 있는 분위기를 가지면서도 혼자 온 손님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조용하다.

마포구 상수동 근처 술집들이 즐비해 시끄러운 거리 뒤편, 조용히 자리하고 있는 작은 식당이 있다. 일본 만화 속 심야식당을 그대로 가져다놓은 듯한 모습의 ‘김씨네 심야식당’이다. 일본식 주방과 특유의 한적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김씨네 심야식당은 해가 질 때쯤이 돼서야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해 새벽 2시까지 영업한다. 또한 대표 메뉴인 ‘아부라소바’를 비롯해 일본 만화 속에서 실제로 등장했던 메뉴인 ‘네코맘마’ ‘명란 오차즈케’ 등을 판매하며 만화 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풍겨내고 있다.

▲ ‘김씨네 심야식당’의 직원이 뿌듯한 얼굴로 손님에게 따뜻한 아부라소바를 건네 주고 있다. 뒤로 보이는 일본풍 주방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차분한 분위기의 김씨네 심야식당, 만화 속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낸 그곳에는 만화 속에서처럼 여러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온다. 늦은 밤 김지혜(여·25) 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홀로 식당을 찾아왔다. 사색에 잠긴 채 창가에 앉아 천천히 아부라소바를 먹기 시작한 김 씨는 음식을 먹는 내내 한숨을 내쉬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우울할 때면 습관처럼 이곳을 찾게 된다는 김 씨. 그녀는 “연인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이다”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며 배를 채우고 싶어 이 곳에 왔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심야식당은 슬픈 날마다 음식을 먹으며 혼자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는 조용한 공간이다. 김 씨는 “이곳의 아부라소바는 괴로울 때 집에 돌아가 울기 전에 먹는 음식이다”며 눈물을 보였다.

“피로를 풀기 위해 들어왔어요”
일상에 시달린 당신을 위한 골목의 휴식처

번잡한 홍대의 밤거리를 벗어나 연남동의 골목길로 발걸음을 돌리면 한 구석에 ‘요코쵸’라는 가게가 보인다. 일본어로 ‘골목’이라는 뜻을 가진 요코쵸는 일본 선술집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낸 곳으로, 밤늦게 문을 열고 새벽 2시까지 영업하는 심야식당이다. 이곳에서는 골든 리트리버 ‘땡구’가 꼬리를 흔들며 하루 동안 지친 손님들을 반기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직접 부채질을 해가며 공들여 구워낸 꼬치구이들을 판매하는 요코쵸에는 퇴근 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박종민(남·36) 씨는 회사에서 업무를 마친 후, 식당들이 모두 문을 닫은 시간까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이 곳에 오게 됐다. 박 씨는 “퇴근 후 피로를 풀고 싶은 마음에 이곳에 왔다”며 “친구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요코쵸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요코쵸에서 애완견을 키우며 손님들에게 나갈 음식을 직접 요리하는 사장 윤강훈(남·34) 씨는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1년 반째다. 조용한 연남동 골목에서 심야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윤 씨는 “늦은 시간까지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심야식당을 차리게 됐다”며 “손님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음식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네에 사는 주민들과 퇴근한 3~40대의 직장인들이 주로 찾아오는 이곳에서 윤 씨는 손님들에게 때로는 형, 동생, 친구가 돼주기도 한다. 그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손님들과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는 편이다”며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내가 생각났다며 선물을 사오는 손님들도 있다”고 말했다.

“배도 채우고, 마음도 채우고 가세요”
지친 하루 속 피로 회복의 공간, 심야식당

다시 상수동으로 돌아와 한적한 밤거리를 거닐다 보면 사람들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도로변에 홀로 잔잔하게 불이 켜진 가게 하나를 볼 수 있다.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마다 저녁 7시에 문을 열고 새벽 5시에 문을 닫는 심야식당 ‘밤 키친’이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노란 빛의 조명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나른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곳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보듬어 주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만화 ‘심야식당’ 속의 마스터를 연상케 하는 밤 키친의 사장 양희성(남·32) 씨는 호주에서 요리 학교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를 다니며 9년 동안 요리를 배웠다. 평소 밤 특유의 조용하면서도 어두운 분위기를 좋아하고 심야식당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는 양 씨. 그는 한국에 돌아온 후 만화 속 심야식당과 최대한 비슷한 식당을 열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심야식당 밤 키친을 개업했다. 식당 운영에 있어 음식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그는 “음식을 만들다 보면 자신마저 먹고 싶어지는 음식이 있다”며 “항상 그런 음식을 만들어 손님에게 드리는 것이 목표다”고 밝혔다.

밤 키친은 단 한 명의 요리사가 모든 요리를 도맡아 하는 만큼 음식이 나오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이 때문에 메뉴판의 맨 앞에는 ‘요리가 천천히 조리되니 양해를 구한다’는 말이 써져 있다. 하지만 한가한 새벽 시간에 찾아온 손님들은 요리가 나오는 속도가 느리다고 해서 보채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 그저 느긋하게 앉아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기다릴 뿐이다. 오히려 식당의 손님들은 여유를 느끼며 “음식이 너무 맛있다”며 양 씨를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모습을 보였다.

▲ ‘밤 키친’의 사장 양 씨가 당일 직접 장을 보고 온 재료로 손님들에게 나갈 음식을 만들고 있다. 그의 어깨에 너머로 가려 보이지 않는 손이 분주하다.

대부분의 심야식당이 일본식 식당의 모습인 반면 밤 키친의 경우 카페의 모습을 띠고 있다. 밤 키친이 밤에는 식당으로 운영되지만 낮에는 디자인 스튜디오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양 씨는 “아기자기하고 나른한 분위기의 인테리어 덕분인지 손님들이 속마음을 털어놓기 쉬운 곳이라고 말하곤 한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영업시간 또한 다른 곳들과는 사뭇 다르다. 밤 키친은 동이 틀 무렵까지 문을 열어 둔다. 그러다보니 하루를 마무리하고 찾아오는 사람들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손님들이 찾아오게 된다.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우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마음의 안식을 얻고 가는 것이다. 양 씨는 “꽃가게를 운영하는 손님들이 새벽에 꽃 도매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 식사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런 특징들 때문인지 밤 키친을 찾는 손님들과 양 씨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다. 양 씨는 “이곳은 편안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갖고 있다”며 “그래서인지 얘기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자주 찾아온다”고 말했다. 또한 “종종 개인적인 상담을 하러 오는 손님들도 있다”며 “한 손님은 밤 키친이 모든 것을 다 털어 놓게 되는 공간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늦게 문을 닫는 만큼 몸은 고되지만 자신이 만든 요리를 손님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진다는 양 씨, 그는 “종종 같이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싶어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이 있는데 그럴 때 특히 뿌듯하다”며 “앞으로도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손님들이 많이 와 줬으면 좋겠다”고 마지막까지 손님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렇듯 서울 곳곳에는 삶의 무게에 지친 현대인들을 끌어안아 줄 심야식당들이 존재한다. 그곳에 가면 만화 ‘심야식당’에서의 마스터처럼 손님들의 마음을 끌어안아 주는 주인들도 함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따뜻한 한 끼 식사로 속을 든든히 채우며 가슴 속 깊이 묻어 뒀던 사연들을 털어놓는 손님들과 그런 손님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그들과 친구가 되어 주는 심야식당의 주인들. 늦은 밤 피로를 덜어내기 위해 심야식당을 찾는 손님들과 그들의 곁에서 심야식당을 운영하는 주인들 역시 손님들과의 소통을 통해 마음 속 깊이 위로를 받고 있다. 손님들과 주인이 하나가 되어 정겨운 분위기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심야식당, 힘든 하루의 끝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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