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동주의자와 혁명가의 차이는 발전을 저해하느냐 도모하느냐에 있다. 혁명가의 사명은 기존의 관습과 제도를 깨뜨리고 질적으로 향상된 새로운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개방적인 사고와 포용적인 자세로 시대개혁을 꿈꾼 이가 있으니, 호는 다산이요 이름은 정약용(1762~1836년)이다.


실학자로 이름난 다산은 28세 때 과거에 합격한 후 벼슬길에 올라 정치ㆍ경제ㆍ농업ㆍ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보인 팔방미인이다. 그의 이력인 규장각 초계문신, 수원화성 설계, 암행어사, 지방행정관 등의 행적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산이 가장 힘을 쏟은 것은 본업인 학문연구였으며 이는 사회개혁의 의지로 이어졌다. 다산이 추구한 ‘실용’은 곧 ‘인간과 사회의 가치’에 의의를 두고 있었다.


매사 문제의식을 갖고 사회를 바라보던 다산은 당시 조선에서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암행어사로 경기도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에 더욱 확고해졌다. 수령과 아전들의 착취로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민(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치자-피치자의 구조에서 백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치자의 책무와 피치자의 권리를 각성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당시 지배적인 학문이던 주자성리학에 안주하지 않고 묵은 폐단을 제거하자는 논리를 내세웠다. 오늘날 우리가 ‘다산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이 이를 가리킨다.


다산이 저술한 책을 통해서도 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목민심서」는 ‘목민(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초점을 두고 각 지방 관리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흠흠신서」는 법의 집행에서 억울한 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서문에 나와 있다.


이 밖에도 다산은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정조에게 고했으며, 불의에 굽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정조에게는 총애를 받았으나 적군도 많이 생겨났다. 호시탐탐 다산을 노리던 그들은 천주교를 빌미로 다산을 내좇으려 했고 결국 다산의 방어막과 같던 정조가 죽음을 맞이하자 그를 강진으로 유배 보냈다.


그러나 다산은 유배지에서도 개인적 슬픔에 빠져 있지 않고 어두운 시대에 아파했다. 그는 자신의 고초를 개인의 잘못이 아닌 불의(不義)한 시대에 태어난 탓으로 여긴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학문에만 심혈을 기울인 다산은 18년의 유배생활동안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막대한 저술서를 남겼다.


결국 자신의 사상으로 나라를 개혁하지 못한 다산. 그는 죽기 전 “다음 시대에서나마 나의 학문과 사상을 알아줄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현재 그가 우리 민족의 대표적 개혁사상가로 추앙 받고 있음을 다산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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