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올해 초, 흑백의 스크린에도 불구하고 100만 관객을 모은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동주>다. 27년의 그의 삶을 솔직 담백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을 이야기했다. 광복 6개월 전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가 바랐던 세상은 어떤 것일까?

1930년대 중반, 그는 운동장에 걸린 일장기를 보며 학교를 다녀야 했다. 이 현실에서 그가 지어낸 이야기는 어두운 시기의 환한 빛이 됐다. 윤동주 동시의 특징 중 하나인 리듬감 있는 명랑성을 동시 「반딧불」에서 볼 수 있다. 전체가 3연인 짧은 동시로, ‘가자’라는 단어가 반복되면서 즐거움과 싱그러운 이미지를 심어준다. 또한 떠다니는 개똥벌레의 불빛을 그믐달의 조각이라고 본 것이 인상적이다. 그믐달의 나머지 부분이 부서져 내려와 땅 위의 개똥벌레가 됐다. 부서진 달 조각이 이 지상을 환하게 비추는 이야기는 윤동주의 밝은 세상을 말하며, 그 밝은 세상을 만드는 책임이 본인에게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 「팔복(八福)」을 살펴보자.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이 여덟 번이나 반복된다. 1년의 긴 침묵 기간을 갖고 돌아온 윤동주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하며 소리 내어 다시 읽어본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여덟 명이 갖는 각기 다른 복들을 윤동주는 ‘슬퍼하는 자’라 표현한다. 일제 치하에서는 어떠한 슬픔도 우위를 가릴 수 없었고, 슬픔만이 존재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슬퍼하는 자’ 이상으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슬퍼하는 국가였다. 마지막에 ‘저희가 영원(永遠)히 슬플 것이오’라 역설한다. 이 고통과 인내의 끝에는, 모두 ‘함께’ 나누었던 슬픔이 영원의 행복으로 이어질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윤동주는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영원히 함께 슬퍼하고 이를 나누며 서로의 곁을 지키는 것이 결국은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이겨내야만 했던 고통을 영원의 행복으로 승화시켰던 그는, 죽은 지 6개월이 지난 후에야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내면 그 깊은 곳에서 나온 말들은 시대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그의 순수하지만 강한 의지와 의연함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부드럽지만 강한 사람, 윤동주. 그의 시를 통해 필자는 그의 세계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 같다.

                                                                              금도은(산업디자인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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