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작년과 올해 아카데미 감독상을 연거푸 수상한 목하 상종가의 영화감독이다. ‘버드맨’,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 등이 그의 수상 작품인데 정작 이 감독의 낯선 이름을 꼭 기억하고 싶게끔 했던 계기는 ‘비우티풀’(Biutiful, 2010)이란 그의 전작이다. 제목과는 달리 전혀 ‘비우티풀’하지 않은 이 영화는 바르셀로나의 뒷골목 인생을 살다가 불의의 시한부 인생을 맞이하게 된 어느 남자의 이야기다. 마약밀매에다 밀입국자를 다루는 인력브로커인 그에겐 어린 자식이 둘 있다. 험한 세상에 홀로 남겨질 자식을 위해 온몸을 던져 그는 인생의 마지막 3개월을 오로지 돈과 맞바꾼다. 그의 바람은 단 하나. 아이들이 그를 기억해 주는 것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이기에 더욱 그 바람은 간절하다. 하지만 기적은커녕 일말의 희망도 없이 영화는 선인보다 악인에 가까운 한 남자의 고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조명한다. 처절한 삶의 끝에서 죽어 비로소 그는 아버지와 대면한다. 그에게 허용된 유일한 구원이자 이냐리투 감독의 애도 방식이다. 감상에 젖지 않는 치열한 애도. 타인의 재난을 대하는 이 감독의 대처법이다.

최근 발발한 구마모토 지진은 ‘3.11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이 그나마 가시려는 시점에 일본 열도를 재차 강타했다. 다수의 사상자와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고 5년 전 대재해의 충격이 다시금 현실화되었다. 이어 에쿠아도르 지진과 화산 폭발 등 지구 전체에 재난이 잇달아 엄습했다. 하지만 내 자신과 가족이 재난의 피해자, 희생자가 되지 않는 한 재난은 그저 ‘타인의 재난’일 뿐이다. 가까운 일본의 연이은 재해를 통해 환기되는 것은 지리적 인접성에도 불구하고 용케도 재해가 우리를 피해가는 것의 안도감이 대부분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타인의 재난은 언제든 ‘나의 재난’이 될 수 있다. 이번 구마모토 지진의 여파를 경남 지역 일부에서도 체감해 공포감을 호소한 사례는 극히 미미한 일례일 뿐이다.

재난이 진정 두려운 이유는 결코 확률로 예단할 수 없는 그것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찾아올지 알 길이 없다. 재난의 불확실성은 곧 예측 불가능성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닌, 재난이 엄습할 가능성이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도 재난은 언제든 내습할 수 있다. 찾아오는 재난을 완벽히 피할 방도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불현듯 예기치 않게 찾아오기에 그것이 ‘재난’인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되레 재난 그 이후다. 불가항력적 재난이든 인재(人災)이든 애도는 오롯이 인간의 영역인 까닭이다. 그리 보면 ‘세월호 사건’도 ‘가습기 살균제 사태’도 그 이후가 진정한 ‘재난’이다. 한 쪽은 과잉의 애도라며 비난받고, 다른 한 쪽은 애도 그 자체가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애도를 비난하고 지연하는 행위의 기저에는 재난을 그저 ‘타인의 재난’으로만 치부하는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있다. 어떠한 삶이라도 애도되지 못할 삶이란 없다. 그것이 납득될 수 없는 죽음으로 마감된 삶이라면 더욱 치열하게 애도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진정한 애도는 이냐리투 감독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타인과 나, ‘우리들’의 유일한 구원은 오직 그 때에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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