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윤나영 기자>

본교 정문에서 걸어서 십분 남짓한 거리에는 많은 학우들이 등·하교를 위해 자주 이용하는 남영역이 있다. 남영역 주변은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지만, 남영역 뒤편에 위치한 ‘경찰청 인권센터’의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다.

너무도 익숙한 공간에 존재하는 낯선 이곳은 과거,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이름 하에 간첩 혐의자 및 민주화 인사들의 취조와 고문이 이뤄지던 곳이었다.

우리는 자유를 당연하게 누리며 오늘을 살아가지만,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곳에서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된 기념적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과거 인권 탄압의 중심지였던 남영동 대공분실이 인권 보호의 중심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경찰청 인권센터를 방문해 봤다.

◆ 철조망에 둘러싸인 인권센터
꽃샘추위가 끝나고 완연한 봄 날씨를 보인 지난 18일(금) 오후 4시. 분주하게 하교하는 학우들과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 남영역 옆, 인적이 뜸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열 발자국쯤 걸었을까. 높은 담벼락과 위협적인 철조망에 둘러싸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경찰청 인권센터’ 볕이 잘 드는 화창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어두운 외관의 목적지는 왠지 모를 으스스한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경찰청 인권센터는 국민의 인권 보호 및 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곳으로 본관과 별관으로 나눠져 있다. 본관인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는 경찰 내부의 여론 조사를 시행해 결과를 정책에 반영하는 것 외에도 ‘인권 관련 정책 마련’ ‘인권 교육’ ‘성희롱 신고 접수’ 등 다양한 업무를 하고 있다. 별관은 ‘아동·여성·장애인 경찰 지원센터’로 이곳에선 ‘실종아동 찾기’ ‘여성 지원’ 등의 일이 진행된다.

정문 앞에 서서 건물 외관을 바라보고 있으니 경비원이 “학생 견학 왔어?”라며 본관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했다. 외부인에게 개방된 곳은 본관 1층, 4층, 5층이다. ▲인권센터의 기본적인 역사와 현재 활동 현황을 알 수 있는 1층 ▲피의자 조사실을 그대로 보존한 5층 ▲ 박종철 군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이 전시된 4층을 차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람 순서다.

본관 건물 안 1층에는 건물의 역사와 인권센터의 활동을 알리는 ‘역사관·홍보관·영상소개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센터를 방문하기 전, 관람 안내 예약을 해둬 1층에서 경찰청 감사관실 나찬문 경위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경찰청 인권센터의 과거 모습인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1948년 간첩 수사 업무를 위해 만들어졌다. 이후 7~80년대 군사독재 정권 당시에는 간첩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하던 학생들까지 취조하는 공간으로 사용됐다. ‘00해양 연구소’라는 간판으로 철저하게 위장해 있었기에 인근 주민들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존재조차 몰랐으며,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1991년 ‘경찰청 보안분실’로 이름을 바꿨으며, 2005년 국가보안을 담당하는 부서가 홍제동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의 인권보호센터로 탈바꿈했다. 인권을 탄압하던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인권경찰로 거듭나기 위해서였다. 나 경위는 “분단 국가의 현실에서 간첩 행위자들을 체포하고 조사하는 일은 필요했으나, 민주화 운동가들을 체포해 정상 절차를 거친 취조가 아닌 무자비한 고문을 행한 것은 경찰의 분명한 잘못임을 인정해요. 잘못을 알기에 앞으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 봄을 잃은 1987년 남영동
가슴 아픈 과거와 직접 마주할 마음의 준비를 하며, 과거 이곳으로 연행돼 온 피의자들을 취조·고문했던 5층 (구)조사실로 이동했다. 복도로 통하는 출입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니 16개의 초록색 문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리가 어느 문으로 들어왔는지 찾을 수 있겠어요?” 나 경위는 피의자의 탈출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출입구를 찾을 수 없도록 보일러실, 복도 출입문, 고문과 취조가 이뤄지던 방의 문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든 것이라 설명했다. 그는 보여줄 것이 있다며 문 하나를 열었다. 문 밖의 차가운 공기를 느끼기도 전에 아래로 빨려 들어 갈 듯 가파른 경사의 ‘나선형 철제 계단’과 마주했다.

피의자를 취조실로 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계단은 1층과 5층을 한 번에 연결하고 있었다. 계단은 때로 비상시에 이용되기도 했다. 발판을 밟을 때마다 철제와 신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리는 이 계단은 피의자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는 동시에 자신이 몇 층에 위치해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끔 설계됐다고 한다. 이 계단을 이용해 본 적이 있다는 나 경위는 “올라가는 동안 너무 어지러워서 위치, 방향, 공간감각 등이 저하되는 느낌이었죠. 발판을 밟을 때마다 구두 굽과 발판이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울려 위압감마저 들었어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5층에 늘어선 초록색 문 안쪽에는 외부와 차단된 채 피의자들이 고문과 취조를 받던 방이 있었다. 방 안에서는 문을 잠그거나 여는 행위가 불가능하며, 원하는 대로 불을 켜거나 끌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폐쇄 공간’이었다. 방에 들어가 *외시경을 통해 문 밖을 내다보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인 문에 달린 외시경이라면 내부에서 외부를 보는 것이 가능하지만, 이곳의 방들은 모두 불가능했다. 나 경위는 “방 안에서는 밖의 상황을 전혀 볼 수 없어요. 대신 특이하게도 방 밖에서는 외시경을 통해 방 안의 상황을 감시하는 것이 가능하죠”라고 설계의 원리를 설명했다. 철저하게 피의자를 감시할 수 있는 구조였다.

방 안에 있는 건 세면대, 변기, 쪽창이 전부였다. 변기와 세면대 앞에 설치된 칸막이는 그 높이가 가리개의 역할을 할 수 없을 만큼 낮았다. 피의자가 볼일을 보는 시간마저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는 세면대와 변기 외에 욕조도 함께 있었으나, 고문을 받다 욕조 모서리에 가슴이 눌려 들어온 지 10시간만에 사망한 故 박종철 군의 사건 이후 욕조를 모두 걷어내는 공사가 진행됐다고 한다. 이 때문에 故 박종철 군의 방 509호를 제외한 모든 방에는 현재 욕조가 없다.

故 박종철 군이 사망한 509호는 그가 사용하던 이불과 베개, 취조가 이뤄지던 책상, 고문이 이뤄지던 욕조까지도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나 경위는 “다시는 이와 같은 부끄러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는 최대한 당시 상황 그대로를 기억하려 노력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 화해와 소통의 장이 된 인권센터
4층은 ‘박종철 기념전시실’로, 故 박종철 군의 가족들과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는 자료를, 경찰 측에서는 장소를 제공해 만든 공간이다. 故 박종철 군이 영문도 모른 채 고문을 받다 숨진 건물에 그를 기리는 전시실이 세워진 것이다. 이 아이러니한 사실은 서로 대립하던 인권단체와 경찰청이 이제는 ‘인권 보호’라는 공동의 지향점에 도달하기 위해 화합했음을 의미한다.

기념전시실에는 1980년대 초반부터 故 박종철 군이 사망하던 1987년에 이르기까지의 시대 상황과 관련된 사진, 기사 등의 자료와 그의 유품이 전시돼 있었다. 기자는 한 아이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눈물을 흘리는 사진에 유독 눈길이 갔다. 7~80년대, 군사독재에 지친 시민들은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 아이의 아버지 역시 자유를 되찾기 위한 투쟁에서 희생당한 아픈 역사의 일부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민주주의’와 ‘대통령 직선제’를 이뤄내기 위해 싸우던 ‘6월 민주 항쟁’은 故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을 시작으로 확대됐다. 故 박종철 군은 취조 과정 중 이뤄진 물고문으로 인해 사망했지만, 당시 경찰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하며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시신을 검안한 의사가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故 박종철 군이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고 밝혔다. 또한 故 박종철 군의 고문을 담당했던 교도관과의 만남을 기록한 ‘이부영의 편지’를 통해 경찰이 사건을 은폐·조작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편지에는 ‘박종철을 고문치사하는 데 관여한 경찰관은 2명이 아닌 5명이다’라는, 경찰 발표와 다른 내용이 담겨 있었다. 현재 이부영의 편지는 박종철 기념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경찰청 인권센터는 편지뿐만 아니라 故 박종철 군의 방 등 5층의 (구)조사실과 4층의 박종철 기념전시실을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하고 있다. 가슴 아픈 사건을 잊지 않음으로써 인권을 보호하려는 의지를 다잡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꿈꾸다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에서는 인권과 관련된 정책을 수립하고,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인권 유린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체적으로 감시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다. 민간 자문기구인 경찰청 인권위원회 활동을 지원하고, 시민과 함께하는 행사도 개최하는 등 시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다음달 21일(목)에는 ‘제15기 인권아카데미’가 개최될 예정이다. 인권아카데미에서는 시민과 경찰이 인권과 관련된 토론을 벌이며, 인권 관련 강의와 교육이 이뤄진다. 이번 아카데미의 주제는 최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아동 학대’다. 경찰청 인권센터는 인권 관련 간담회도 주최하고 있다. 지난 간담회에서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간담회’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문화 가정, 미혼모, 장애인들과 인권 관련 전문가들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매해 8월에는 ‘경찰인권영화제’를 열어 인권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을 높이려는 시도도 하고 있다. 나 경위는 “아카데미, 영화제 등 학생들이 참여할 만한 여러 가지 행사를 주최하고 있으니 시간이 되면 꼭 보러 오세요”라며 학생들의 행사 참여를 권유했다.

“경찰청 인권센터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이에요” 나 경위의 말에는 ‘과거 고문의 중심지였던 곳이 현재는 인권센터로 변해 약자들이 보호받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작년 경찰인권영화제의 주제인 ‘늘 곁에’라는 말처럼 시민의 곁에 항상 있고 싶죠”라고 말하는 나 경위. 그는 “인권을 생각하지 않고 수사하던 부끄러운 시절을 딛고 새로운 모습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요”라며 경찰청 인권센터가 미래에 시민들의 인권을 보호해나갈 모습을 기대해달라고 당찬 포부를 보였다.
 

(왼쪽 위)▲ 본관 후문에 위치한 나선형 계단이다. 계단을 통해 1층에서 5층까지 바로 올라갈 수 있으며, 오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을 조장한다.
(왼쪽 아래)▲ 故 박종철 군이 숨진 (구) 조사실 509호의 모습이다.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오른쪽 위)▲ 4층 ‘박종철 기념전시실’에 전시된 사진이다. 한 아이가 광주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숨진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다.
(오른쪽 아래)▲ 경찰의 마스코트인 ‘포돌이’가 ‘인권’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외시경 : 현관문에 달린 작은 렌즈. 외시경을 통해 집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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