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윤나영 기자>


온라인 상의 익명 사이트 활성화돼
자유로운 의견 표현 가능해져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기능까지


하지만 신뢰와 책임 결여돼
악성 댓글 등의 문제 생겨나
익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 돌아봐야


A학우는 최근 대학생들의 사용률이 높은 온라인상의 익명 게시판을 사용하고 있다. 다양한 학교의 학생들과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학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익명 게시판을 소통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은 학생들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회사 메일을 통한 인증 절차를 밟아야 가입할 수 있는 직장인 전용 익명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블라인드’가 생겨났다. 블라인드에 가입한 직장인들은 익명 게시판과 업종 게시판을 통해 각 기업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함께 토로하기도 한다.
이들이 이런 사이트를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익명성’에 있다. 사람들은 이제 자연스럽게 가상공간에서 익명의 가면을 쓴 채 다른 사람들과 자유로운 소통을 하게 됐다.

◆ 자유로운 표현의 장, 익명
익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익명의 매력이 ‘솔직함’에 있다고 말한다. 익명이기 때문에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명을 알리고 개인정보를 드러냈을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는 사회적 시선, 비판, 불이익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익명은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 있기 때문에 글쓴이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있든,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든 읽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따라서 글쓴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좀 더 다양한 주제와 내용에 대해 가감 없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
익명은 모든 사람이 글쓴이의 신상을 모르는 상태로 글을 게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내부 고발의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이점을 갖기도 한다. 최근 불거진 ‘건국대 OT 성희롱 사건’은 페이스북 페이지 ‘건국대학교 대나무숲’에 한 익명의 게시자가 올린 글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대나무숲’은 페이스북의 익명으로 운영되는 대표적인 페이지이며,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란 의미를 갖고 있다. 현재 각 대학 별로 ‘대나무 숲’ 페이지가 운영되고 있다. 해당 글에는 올해 신입생 OT에서 진행된 ‘25금 몸으로 말해요’라는 게임에서 민망한 상황이 연출됐다는 제보가 실려 있었고, 이러한 제보로 인해 학교 측에서 조치를 취하는 일이 일어났다. 고려대학교 페이스북 페이지인 ‘고려대학교 대나무숲’에도 이와 같은 제보가 올라왔다.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계속해서 ‘러브샷’을 강요당해 선배의 무릎에 앉아 술을 마셔야 했다며 불쾌함을 나타내는 글이었다. 해당 글에서 글쓴이는 “왜 술을 그런 자세로 먹어야 하는건지 모르겠다”며 “벌칙이 필요하면 차라리 술을 더 줘라”고 잘못된 술자리 문화를 지적했다. 작년 10월엔 교내 따돌림으로 인해 한 학생이 자살까지 이르게 된 중앙대학교 음대 자살 사건 또한 페이스북 페이지 ‘중앙대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라온 익명의 제보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각 학교의 대나무숲에 올라오는 익명 제보들을 직접 읽은 경험이 있다고 밝힌 지하운(한국어문 15) 학우는 “온라인상에 익명으로 제보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쉽고 빠른 고발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며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문제를 부담 없이 제보할 수 있다는 점이 익명의 장점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 책임이 부재하는 익명의 말들
하지만 여기엔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신뢰와 책임의 문제다. 익명으로 게시된 글에는 여과되지 않은 말이나 지나친 과장이 포함돼 있어도 그 정확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충동적으로 쓰는 악성 댓글 또한 익명이 만들어낸 심각한 폐단이다. 익명의 가면 뒤에 숨은 사람들은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심한 말들을 온라인상에서 내뱉는다. 익명으로 모든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책임을 회피하기도 쉬운 것이다.
대형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일간베스트’‘소라넷’ 등은 익명으로 글을 게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해당 사이트들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욕설과 악성 댓글 등의 문제가 빈번히 일어나는 사이트로 악명이 높다. 비실명제 기반사이트의 특성상 심리적 제어 장치 없이 무차별적인 말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성 댓글, 무차별적 비난의 화살은 대부분 공인들에게 돌아간다. 일례로 배우 김수미는 최근 악성 댓글의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고민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다. 종합격투기 선수 송가연 또한 자신의 경기를 본 한 네티즌이 쓴 악성 댓글에 큰 충격을 받아 훈련을 접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익명 제도가 낳은 악성 게시물들은 피해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정작 가해자들은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그에 대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그 상황을 방관하는 실정이다.
이에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동아일보 “손 묶인 20代 ‘악플 폐인’“세상 살맛이 안나…” 투신” 기사를 통해 “인터넷에 악플을 지속적으로 올리는 것은 자신의 상태나 욕구를 알리고자 하는 과시욕과 사람들의 반응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관음증의 발현”이라며 “이런 욕구가 좌절되면 익명성에서 오는 분노로 인해 더욱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익명이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며 불특정인을 겨냥한 인신공격, 언어폭력 등으로 드러나는 폭력성을 더 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 익명성의 폐단, 우리 주변에도 있다
익명에 의한 문제는 비단 연예인, 스포츠 선수 등 공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최근에는 익명을 사용하는 여러 어플리케이션과 SNS가 생겨나며 일반인들까지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에브리타임’은 국내 대학생들이 사용하는 시간표 및 커뮤니티 사이트이다. 에브리타임의 게시판은 익명으로 글과 댓글을 작성할 수 있다. 해당 사이트는 본교에 대한 서비스를 지원하는데, 모든 대화가 익명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때때로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한때는 본교 학우들의 사진을 소개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학우들의 사진에 대해 에브리타임의 익명 게시판에서 특정 학우의 실명이 거론되며 외모를 비판하는 게시물이 여럿 올라와 논란이 일었다.
에브리타임을 이용해 익명으로 책을 거래하는 상황에서 불거진 오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학우도 있었다. 판매자가 책을 거래 장소로 지정된 사물함에 갖다 놨지만 책이 사물함에 없다고 오해한 구매자가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글을 게시했고, 그를 바탕으로 타 이용자들이 책을 판매한 학우를 비난하고 그 학우의 신상을 밝힌 사례다. 이후에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일임이 밝혀졌지만, 익명의 이용자들에 의해 비난을 당한 피해자는 그에 합당한 공식적 사과를 받지 못했다. 이처럼 같은 학교 학우 사이에서 다수의 익명이 특정 개인의 신상을 파헤치고 정신적 피해를 준 사건은 익명성이 만들어낸 폐해다. 이에 대해 최다은(미디어 14) 학우는 “에브리타임이나 교내 익명 커뮤니티 스노로즈를 사용하다보면 유용한 정보를 얻을 때도 많지만 유언비어가 실시간으로 퍼져나가기도 한다”며 “익명으로 말할 때도 실명으로 이야기했을 때와 같이 부끄럽지 않도록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대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SNS 공간도 익명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SNS 세컨드 계정’을 생성해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지인들과 소통하기 위한 본인의 제1계정이 아닌 특정 의도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익명의 두 번째 계정이다. 지인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게시물을 게시할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용자들이 한 곳에서만 글을 게시하고 읽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비해 SNS는 사용자가 더 많고 글들의 유통 및 공유 또한 빠르고 자유롭다. 이 때문에 익명의 SNS 세컨드 계정은 익명성에 의한 또 다른 문제를 낳기 쉽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한다.

◆ 익명, 이제 그 문제점을 해결해야 할 때
온라인상에서 익명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보다 자유로운 의견 나눔의 장이 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익명을 보장해주는 커뮤니티 등이 활성화되며 ‘익명성’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무분별한 정보를 퍼나르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등의 문제가 거듭 생겨났다. 그리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입히며 점점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온라인 공간은 오랜 시간동안 익명성을 바탕으로 형성됐지만, 최근엔 그 동향이 바뀌고 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게시할 공간이 마련된 ‘페이스북’ 등과 같은 SNS들이 등장해 온라인상에서 실명을 사용하는 일이 늘어난 것이다. 대형 포털 사이트인 구글 역시도 익명성이 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라인 공간을 실명 세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전(前)구글 CEO 에릭 슈미트는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내용이 있다면 처음부터 그 일을 하지 말거나 인터넷에 올라오지 못하게 했어야 한다”며 “우리는 더 이상 숨을 공간이 없으므로 온라인 공간 또한 현실 공간과 같이 투명성이 강화되고 익명성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온라인상에서 온전히 실명으로 활동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일 때 가장 솔직하지 못하다. 가면을 건네주면 그는 진실을 말할 것이다”고 말했다. 익명성이 사람들 내면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앞서 다룬 익명 페이지 ‘대나무숲’‘대신 전해드립니다’는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 기능을 잃는다. 아무도 없는 공간일지언정 자신의 이름표를 달고 진실을 밝히기는 꺼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익명성이 가져오는 수많은 폐해를 간과할 수도 없다. 온라인 공간이 발달한 뒤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 실명, 익명제’에 대한 갑론을박이 펼쳐지는 이유일 것이다.
온라인상에서의 악성 댓글 및 루머 생성을 방지할 절차와 규제도 중요하지만, 그 전에 하나 돌아봐야 할 것은 익명성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생활 속에서 수도 없이 만나는 온라인 커뮤니티, SNS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익명이니까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겠지’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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