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경 교수의 숙명 타임머신]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는 13세가 되던 1906년 황태자비로 간택됐다.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하면서 그녀도 황태자비에서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1910년 한일합방으로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한일합방 당시 병풍 뒤에서 몰래 어전회의를 듣던 윤 황후가 옥새를 치마폭에 넣고 내놓지 않자, 백부 윤덕영이 조카인 황후를 협박하여 옥새를 빼앗은 일은 그녀의 곧은 성품을 알게 하는 유명한 일화다. 1919년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붕어하고, 1926년 순종마저 붕어하게 되면서 윤 황후는 명실상부한 황실의 상징적인 구심점이 됐다.

순정효황후의 아버지 윤택영과 백부 윤덕영은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윤 황후의 아버지 윤택영은 순종황제의 결혼식 비용부담과 방탕한 생활로 인해 단군 이래 최대의 채무자가 돼 채무왕, 부채왕, 차금대왕 등 치욕스런 별명으로 불리다가 1928년 경성지방법원에서 파산선고를 받았다. 황실의 인척 가운데 윤 황후의 오빠였던 윤홍섭은 드물게도 일제와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으며, 윤 황후가 하사한 내탕금으로 상해 망명을 앞두고 있던 신익희에게 10만 원을 줘 임시정부수립 준비 자금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등 물심양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윤홍섭은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졸업했다. 와세다 시절 신익희와 장덕수의 학비를 지원했으며, 특히 신익희는 윤홍섭과 가장 단짝이어서 둘은 그림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직전 윤홍섭은 최남선의 부탁을 받고 윤용구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가 체포당해 취조를 받기도 했다. 윤홍섭과 장덕수는 미국 유학시설 오레곤 주립대학 신문학과 동창생으로 삼일신보에서 함께 활동했다. 윤홍섭은 콜롬비아 대학 석사과정을 거쳐 1935년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정치와 비교헌법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했으며, 이후에도 일제와 타협을 거부했다.

1944년 정월 무렵 윤홍섭은 동경에 있던 영친왕을 찾아가 카이로 선언을 상기시키며 일본의 패망은 기정사실로 머지않아 한국이 독립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영친왕에게 “일본의 왕족이 아니라 조선의 황태자”라는 것을 밝히기를 권유했다.

해방이 되자 윤홍섭은 구왕궁 사무청 사무장관으로 황실재산을 관리했으며, 숙명학원 3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윤홍섭은 1949년 4월 국회에 ‘숙명학원 재단 재건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진성서의 내용은 “구 왕궁청 소유재산의 일부를 분할해 재단법인 숙명학원 기본재산에 편입하고 숙명여자대학과 숙명여자중학교 경영에 지장이 없도록 하게 할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장은 윤홍섭과 친분이 깊었던 신익희였다. 이 안은 재석의원 104명 가운데 71명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또한 1950년 제정된 구왕궁재산처분법 제4조에는 “구왕궁의 기부행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유지경영에 필요한 재산은 양여한다”라는 조항이 들어가게 됐다. 황실에서 설립한 학교에 대한 지원이 법적으로 명문화된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황족이자 지식인이었으며 일제에 비타협적으로 저항했던 윤홍섭 그리고 윤홍섭에게 내탕금을 지원해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했던 순정효황후는 황실학교 숙명이 기억해야 할 역사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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