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주를 맞아 조금 오래된 유럽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제목은 <정복자 펠레(Pelle the Conquer-or)>로 1988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1989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덴마크와 스웨덴의 합작 영화이다. 배경은 19세기 덴마크. 스웨덴 이민자로 농장의 허드레 일꾼인 홀아버지 ‘라세’와 아들 ‘펠레’가 주인공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허용된 소박한 꿈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 착한 아버지와 아들이지만 그들이 현실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삶은 멸시와 매질 그리고 배고픔이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현실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능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착한 아들, 그들의 미묘한 부자 지정이 영화의 주요 테마이다.

자식을 매질한 사람에게조차 비굴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와 그것을 덤덤히 바라보는 아들이 주는 처연함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 펠레는 “나는 늙고 병들었지만, 너는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을 뒤로하고 눈 오는 어두운 밤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혼자 뚜벅뚜벅 걸어간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펠레가 바로 정복자인 것이다.

기억 속에 가물가물한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어느 재벌 회장의 빗나간 부정(父情) 때문이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술집에서 맞고 들어온 스무 살 넘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회장이 수십 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청담동과 북창동의 술집들을 휩쓸었다고 한다. 별 두 개가 그려진 모자를 쓰고 가죽 장갑을 낀 회장이 직접 아들과 시비가 있었던 사람들을 꿇어앉혀 폭행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기가 차 말문이 막힌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가진 재벌 회장이 역시 모든 것을 가진 자식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 너도 나처럼 세상을 정복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3류 싸구려 영화의 주인공들도 이보다 더 싸구려이기 어렵다.

매년 맞이하는 어버이 주간이 올해는 여느 때 같지 않다. 재벌 회장님과 펠레의 아버지 그 사이 어딘가 우리네 부모님들이 있다. 많은 보통 어버이가 회장님보다는 펠레의 아버지에 가까울 것이다. 영웅도, 정복자일 수도 없는 부모님들이다. 황야에 홀로 자식을 내보낼 수밖에 없는 부모님들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존경받아야 할 우리의 부모님들이다. 3류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1류 영화의 주인공인 그들에게 어버이날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올리고 싶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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