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경 교수의 숙명 타임머신]

<그래픽=윤나영 기자>

“27대 고종황제 막동왕자 인질이요, 일본으로 건너간 후 돌아올 길 묘연터니”

조애영이 쓴 은촌내방가사집에 있는 ‘한양비가’에 나오는 영친왕에 대한 묘사다. 영친왕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직후 태어나 1900년 영친왕으로 책봉됐다. 1907년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순종의 황태자가 됐으며 그해 12월 11살의 나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가야 했다. 영친왕의 일본유학은 볼모로서의 의미도 있었지만, 대한제국의 황태자를 일본인으로 만들겠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영친왕은 일본정신을 심기 위해 만들어진 황실자녀교육기관인 학습원과 육군유년학교를 다니면서 제국군인의 길을 걸어야했다. 영친왕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인으로 동화돼 가고 있었다. 게다가 영친왕은 일본 황족 나시모도노미야(梨本宮)의 장녀 마사꼬(方子)와 1920년 4월 정략결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10년 한국이 병합되면서 고종황제는 이태왕으로, 1907년 즉위한 순종황제는 이왕, 영친왕은 이왕세자로 격하됐으며 일본의 황족에 편입되고 말았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한 뒤에는 영친왕이 왕위를 계승하여 제2대 이왕에 즉위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할 때 영친왕의 경우 당시 국권이 상실돼 ‘자의’가 있을 수 없었으며 그런 상황에서 반민족 행위자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재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영친왕의 행적이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적인 존재로 일제에 이용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었다면, 그 또한 민족과 함께하는 운명 즉 일제로 흡수 동화돼가는 민족의 표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고종황제는 “너 일본에 가거든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아예 얼굴에 나타내지를 말고 조심하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영친왕은 천성이 온후한데다 고종황제의 교훈으로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좀처럼 얼굴에 나타내지를 않았다. 그런 영친왕도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또 도움을 주고자 했던 일이 어머니 엄비의 유지를 이은 교육 사업이었다.

양정, 숙명, 진명의 세 남녀학교는 엄비가 재산을 주어 창설한 학교로 생도들이 수학여행이나 운동경기가 있어 동경에 왔을 때는 으레 영친왕저를 예방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영친왕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있는 남자 유학생을 위해서는 이화회를 여자유학생을 위해서는 홍희료를 만들어 각각 학비를 도와주고 기숙할 집을 마련해 주었다.

1938년 봄 조선에 왔을 때 숙명여자전문의 창설계획을 듣고 경성부 종암정의 산림을 하사해 기본재산을 삼게 하였으며, 학교 부지가 없다는 말을 듣고 현재 숙대가 있는 6천 여 평의 땅을 영구 무상 대부케 하는 한편 방자 왕비의 총재취임도 허락하였다. 영친왕은 조선을 방문할 때마다 항상 진명, 양정, 숙명, 숙명여전 등 구황실이 세운 학원을 돌아보았다.

일제의 패전 이후, 영친왕의 존재가치는 사라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1963년 11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지 56년만에 김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돼있었다.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1970년 73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최후의 숨을 거두고 고종황제의 무덤이 있는 금곡 왕릉에 만년유택을 마련하였다. 그의 장례식에 놓여있던 일본 천황의 화환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의 슬픔마저 회한으로 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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