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경복궁의 야간 개장으로 고궁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진 요즘, 화려한 야경 대신 고궁 속 숨겨진 조선의 역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서울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이렇게 5개의 궁이 남아 5대 궁이라 불린다. 1만 원이면 구매할 수 있는 서울 5대 궁 통합 관람권을 들고 서울 고궁투어에 나섰다. 화려한 단풍과 함께 궁궐을 거닐다 보면 숨어있던 옛 수도 한양의 모습이 고개를 든다. 시간마저 멈춘 것 같은 곳, 서울 5대 고궁에서 500년 전 조선을 마주했다.

창덕궁으로 향하다
직장인들이 정신없이 출근하는 오전 9시, 종로3가역 6번 출구로 나와 창덕궁으로 향했다. 창덕궁은 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궁궐로 조선의 궁궐 중 임금들이 가장 오랫동안 거주했던 궁궐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할 수 있으며 입장료는 3,000원이다. 만 24세 이하의 청소년과, 65세 이상은 신분증을 제시하면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창덕궁에 도착하자 정문 ‘돈화문’이 가장 먼저 보였다. 경복궁의 별궁이었던 창덕궁은 왕이 거주하면서 점차 본궁의 역할을 하게 됐다. 창덕궁의 역할이 커지자 돈화문도 점차 크고 높은 구조로 개조됐다. 돈화문을 지나면 ‘금천교’라는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 밑의 흐르는 물에 악한 기운을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궐에 입장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 나타난다. 이곳은 백성들이 신문고라는 북을 치면서 자신의 억울함이나 불만을 하소연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지키는 돈화문이 부담스러웠던 탓인지 실제로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진선문을 지나면 왼쪽에는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인정문’이, 정면에는 ‘숙장문’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궁궐은 바르고 대칭적인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진선문에서 숙장문까지의 공간은 사다리꼴 모양이다. 왜 이 공간은 일반적인 직사각형 모양이 아닌 걸까. 숙장문 바로 옆쪽에는 종묘를 받치고 있는 산이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공간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이유로 인정문 앞마당은 사다리꼴 모양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왕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 위풍당당한 모습의 창덕궁 인정전

진선문 왼쪽에 보이는 인정문으로 들어가면 ‘인정전’이 등장한다.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 세자 책봉식, 과거시험 등 공식적인 행사가 진행되던 곳이다. 인정전의 지붕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지붕의 맨 윗부분에 5개의 꽃문양이 보인다. ‘이화 문양’이라고 불리는 이 꽃문양은 대한제국의 문장으로 자두나무 꽃을 형상화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나타난 인정전 이화 문양에 대한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창덕궁의 가치를 격하시키기 위해 일제가 주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화 문양은 일본 황실에서 쓰이던 문양이기 때문이다.

인정전에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만 돌리면 다른 전각과는 달리 푸른빛을 띠는 지붕이 보인다. 바로 ‘선정전’이다. 왕은 선정전에서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곤 했다. 선정전은 가격이 비싸 다른 전각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청기와를 사용해 특별함을 나타냈다.

후원을 통해 왕의 발자취를 찾다
창덕궁 내부를 관람하고 나면 창경궁과의 연결통로인 ‘함양문’과 후원으로 가는 입구가 나온다. 창덕궁 후원 혹은 비원, 금원으로 불리는 이곳은 왕가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던 궁중 정원이다. 왕은 이곳에서 자연을 즐기며 고된 업무의 피로를 풀었다. 후원은 다른 궁과 달리 사전 예약과 입장료 5,000원을 준비해야 관람할 수 있다.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단풍은 많이 떨어졌지만 후원을 구경하러 온 관람객들로 입구는 북적북적했다. 언덕을 넘어 가장 먼저 보인 곳은 ‘부용지’라는 연못이다. 왕이 이곳에서 낚시를 하다 물고기를 낚으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신하들이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부용지 옆 ‘춘당대’ 마당에서는 과거시험이 치러졌다. 춘향전의 이몽룡이 과거시험을 봤다는 장소이기도 하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지붕이 이중층인 육각형 모양의 정자 ‘존덕정’이 나온다. 존덕정 옆에는 ‘관람정’이라는 정자와 ‘관람지’라는 연못이 있다. 신기하게도 존덕정의 모양은 한반도 모양이다. 원래는 네모난 연못과 동그란 연못이 각각 존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두 연못이 합쳐졌다고 한다.
 
창경원의 아픔을 지닌 창경궁
이미 단풍이 많이 져버린 후원과 달리 창경궁은 입구부터 알록달록한 단풍이 가득했다. 새빨간 단풍나무 밑에 서서 사진을 찍거나 구경하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매표소 직원 황현주 씨는 “창경궁은 ‘춘당지’라는 연못의 광경이 가장 아름답다”며 “특히 요즘 같은 성수기에는 연못과 단풍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로 창경궁이 가득 찬다. 하루에 2-3천 명 정도 방문한다”고 말했다. 창경궁은 1418년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었다. 1483년부터 대왕대비와 왕후의 거주를 위해 수강궁을 확장하면서 창경궁이 됐고 이곳에는 여자들이 주로 거주하게 됐다.

▲ 창경궁 춘당지 앞,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밑에서 관광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현재 창경궁의 춘당지는 소춘당지와 대춘당지로 나뉘어 있다. 원래 현재의 소춘당지만 춘당지라고 불렀고 대춘당지는 임금과 왕비가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만든 논이었다. 일본이 창경원을 개장할 때 논이 있던 자리에 연못을 파 대춘당지를 만들면서 현재의 춘당지가 됐다.

춘당지 뒤쪽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동물원과 함께 세워진 ‘대온실’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 코미야 미호마츠는 우울하고 쓸쓸한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 하에 궁궐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었다. 이름 또한 창경원으로 바꿨다. 조선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궁궐을 격하시켜 유희의 공간으로 만드는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창경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 식물원이 됐다. 독립 후 동물원은 1983년에 폐원했지만 식물원은 대온실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한 덕수궁
서울광장과 횡단보도를 사이에 둔 덕수궁은 매일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정동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덕수궁은 우리 역사 최초로 황제국의 문을 연 대한제국의 정궁이다. 덕수궁 개방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며, 입장은 오후 8시까지다. 덕수궁 입장료는 1,000원이지만, 만 24세 이하 청소년과 65세 이상은 신분증을 제시하면 무료입장이 가능하다.

대한제국의 흥망성쇠를 같이 한 덕수궁의 본래 궁호는 ‘경운궁’이다. 태황제가 된 고종이 계속 경운궁에 머물자, 태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덕수(德壽)궁으로 바꿔 부르게 됐다. 경운궁은 원래 선조가 임진왜란 후 잠시 머물었던 곳이었는데, 광해군 때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이고 크기를 확장했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다시 역사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경운궁 복구를 명했기 때문이다. 경운궁을 확장한 후 고종은 경복궁에 모셨던 명성황후의 관을 경운궁으로 이전했다.

단풍나무와 소나무가 늘어선 길과 공터 덕분에 덕수궁은 궁궐보다는 도심 공원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을 낙엽을 즐기기 위해 덕수궁을 찾은 연인과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많았다.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덕수궁은 야간까지도 개장한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날씨가 꽤 쌀쌀해지기 때문에 두꺼운 외투를 챙겨가는 것이 좋다.
 
대한제국의 영원한 창대를 기원하다
덕수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한문’을 거쳐야 한다. 대한(大漢)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으로, 새로 태어난 대한제국이 영원히 번창하라는 염원을 담았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3시 30분에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행사가 열린다. 생동감 있게 치러지는 재현 행사는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므로, 잠시 걸음을 멈춰 관람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 덕수궁 정문 앞에서 왕궁수문장 교대의식 행사자 진행 중이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는 덕수궁의 금천교는 다른 궁궐에 비해 턱없이 짧다. 서울의 도로 확장 과정에서 덕수궁 동측이 서울광장의 일부가 됐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덕수궁은 과거 덕수궁 크기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금천교를 건너 중화문을 지나면 ‘중화전’을 볼 수 있다. 중화전은 경운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장소다. 당시 대한제국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조선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 영국, 일본, 미국 등 세계열강들은 각축전을 벌였다. 중화전에는 열강의 각축 속에서, 조선이 중립을 지키며 세계 질서 속에 당당하게 자리 잡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동양과 서양의 조화로움을 담아내다
러시아, 영국, 미국 대사관에 둘러싸인 덕수궁에서는 서양식 건축물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중화전 서측에 위치한 ‘석조전’은 서양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따라 설립된 건축물이다. 침전과 만찬장 등으로 사용되던 석조전은 고종의 서거 후 미술관으로 이용됐다. 석조전은 덕수궁 내부의 건물 중 유일하게 사전 예약을 거쳐야만 관람이 가능하다.

석조전을 지나 걷다 보면 궁 뒤편에 위치한 ‘정관헌’을 만나볼 수 있다. 정관헌은 석조전과는 달리 독특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전체적으로 서양의 목조 구법으로 지어졌으나, 기둥 상부와 금속 난간에 새겨진 소나무, 사슴, 그리고 황금 박쥐 문양은 우리의 전통 건축 양식이다. 궁궐 후원에 위치한 정관헌은 독특한 모양과 고요한 분위기 덕분에 한층 더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일제강점기의 수난을 간직한 경희궁
종로구 신문로 고층 빌딩 숲 사이에는 노란 단풍나무에 둘러싸인 경희궁이 있다. 경희궁은 서울에 있는 조선 왕조 5대 궁 중 하나지만, 경희궁의 존재를 아는 이는 드물다. 궁이라고 보기에는 작은 규모 때문이다. 도심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희궁을 찾았다. 경희궁을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입장료는 무료다.

창건 당시 경희궁은 정전, 침전 등이 1,500칸에 달하는 규모였다. 하지만 경복궁 중건과 함께 경희궁은 점점 방치되기 시작했다. 특히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큰 수난을 겪었다. 일제는 ‘왕기가 서린 땅’이라는 풍수설을 명목으로 경희궁 터를 파괴했다. 1911년 6월 경희궁의 모든 토지와 건물은 총독부에 인계됐으며, 일제는 그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웠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경성중학교의 기숙사나 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조선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던 경희궁은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이후 서울시는 경희궁 터를 공원용지로 지정해 경희궁 공원을 개방했고, 발굴되지 않은   경희궁 궁역 위로 서울 역사박물관을 세웠다. 살아있는 역사를 간직한 조선의 궁궐이 역사박물관 아래로 묻힌 것이다.

▲ 덕수궁으로 견학을 온 아이들이 단풍놀이를 즐기고 있다.

계절의 정취를 즐기기 위해 또는 아름다운 궁궐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 궁궐을 찾는 사람은 많지만, 우리의 궁궐이 겪은 역사적 아픔까지 고려하는 이는 드물다. 우리나라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고궁은 무게를 측정할 수 없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덕수궁 관광 안내자는 “대학생들이 역사를 알기 위해 궁궐을 찾는 경우는 드물다”며 “고궁을 통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조금이나마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안창모 저, 동녘
『우리 궁궐의 비밀』혜문 저, 작은 숲

저작권자 © 숙대신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