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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 다큐로 지성을 입다
이채연 기자  |  smplcy87@s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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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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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에게 요즘 어떤 프로그램을 즐겨 보냐고 물으면 대부분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꼽는다. 교양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 들이는 매력이 부족한 것일까. 의도적인 연출이 불가능하고 익숙한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는 자칫 지루하고 딱딱하다고 오해하기 쉽다. 이런 다큐멘터리에 대한 오해를 풀기위해 지난 12일(수), KBS 기획제작국 편집실에서 손현철 PD를 만났다. 시청자의 눈과 귀가 될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좁은 편집실에서 끊임없이 촬영 영상을 편집하고 있던 그에게 물었다. 다큐멘터리의 가치와 앞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나아가야할 방향은 무엇일까?

   
 

다큐멘터리 PD가 된 전직 카피라이터
올해로 KBS에 입사한지 21년이 됐다는 손 PD. 다큐멘터리 PD로 <다큐멘터리 3일>, <KBS 파노라마>, <과학스페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해 왔지만, 처음부터 그가 다큐멘터리 PD 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영화를 즐겨보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서울대 철학과생이었던 손 PD는 졸업 후 2년 간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광고는 상업적 성격을 갖기 마련인데, 기업이나 타인의 상품을 홍보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카피라이터 일을 평생 하기에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죠” 평소 영화를 즐겨 보던 취미 생활은 그가 PD의 꿈을 갖는 데 일조했다.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메모도 하고 영화에 대해 짧게 평도 써보면서 카피라이터 일을 그만두면 PD를 하려고 마음 먹었죠”

현재는 다큐멘터리 PD로 활동하고 있지만 손 PD는 사실 드라마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의 경우 AD(Assistant Director) 과정을 5, 6년 정도 거쳐 직접 연출을 하는 PD가 된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입사했던 그는 드라마 AD 생활에 부담을 느껴 다큐멘터리 PD로 방향을 전환했다. “다큐멘터리는 AD 생활이 비교적 짧고, 스스로 원하는 아이템을 기획해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원래는 드라마를 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다큐멘터리를 선택한 것은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시청자들에게 PD는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지만, 완성된 프로그램이 우리의 눈으로 전달되기까지 PD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다큐멘터리 PD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손 PD는 “다큐멘터리 PD는 주도적으로 기획부터 방송이 방영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도맡아 한다”고 답하며 PD 개인의 능력과 의지를 강조했다. 대본에 맞춰 촬영을 하고 자유롭게 촬영 순서를 조정할 수 있는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는 생생함을 담는 것이 중요하다. “<다큐멘터리 3일>을 촬영할 때는 주어진 72시간 안에 촬영을 마치는 원칙을 정확히 지켰어요. 시간 순서대로 찍고 있는 그대로를 담았죠” 물론 <다큐멘터리 3일>처럼 특수한 형식을 따르지 않는 일반 다큐멘터리들은 편집 과정을 거친다. “극적 효과를 주거나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영상 순서를 바꾸는 경우도 있어요”

손 PD는 2, 3년 전까지만 해도 방송 원고를 직접 썼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 편집과 원고 작성을 병행한 것이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대한 그의 열정과 노력은 프로그램의 기획부터 완성까지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손 PD, 다큐멘터리의 역할을 고민하다
우리나라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예능과 드라마가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특히 대한민국 예능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자 탈피해야 할 점으로 ‘회고주의’를 꼽았다. “외국의 예능 프로그램은 처음 보는 사람을 등장시켜 시청자들이 앞으로 전개될 방향을 궁금해 하도록 유도하죠. 전망을 제시하는 거예요. 반면, 우리나라는 캐릭터가 정해진 연예인들이 예상 가능한 행동을 하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대다수죠. 이런 우리나라 예능 프로그램의 특징 때문에 시청자들은 점점 더 과거지향적인 성향을 갖게 돼요” 손 PD는 우리나라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현주소를 냉철하게 바라봤다.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오락 프로그램의 순기능은 높이 평가하지만, 시청자들에게 회고적인 성향을 강화시키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와 전망, 그리고 관점. 손 PD가 방송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그는 재미와 감동, 전망을 동시에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은 다큐멘터리뿐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관점이에요. 재미를 주든지 감동을 주든지,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이야기라는 확신이 들어야 일을 시작하죠”

지난 9월 19일(금)에 방영된 <KBS 파노라마>의 주제 ‘플랫폼 혁명 - 게임의 규칙이 변한다’는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알리바바’, ‘애플’, ‘구글’과 같은 플랫폼 회사들의 약진을 보여주며 한국 경제가 처한 위기를 진단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플랫폼에 관한 내용을 방송에서 쉽게 풀어서 이야기 해주면 사람들에게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았어요. 특히 새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청년들이나, 아이폰 또는 구글을 사용하면서도 이 시스템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경제 동향을 알려주는 데 의미가 있을 것 같았죠”

자연이나 시사 다큐멘터리처럼 신기한 생물이 나오거나 중심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닌 플랫폼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소재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방송이 과연 사람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그는 재미가 중요한 요소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재미만으로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재미와 전망, 그리고 관점이 잘 어우러졌을 때 좋은 프로그램이 탄생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다루는 소재는 사람, 자연, 사건으로 함축돼 있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새로운 면이 보여요. 새로운 관점으로 사람들에게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죠. 이 과정에서 재미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같아요” 
 

PD이자 작가이자 사진가, 손현철
PD로 활동하기에도 벅찰 법한데 손 PD는 등단까지 한 전문 작가다. 그의 행보에 집필을 빼 놓으면 섭섭하다. 2011년 방송된 <환경 스페셜> 제작 이후, 프로그램의 연장선으로 <모래강의 신비>를 집필한 그는 이듬해인 2012년 <세 PD의 미식기행, 목포>를 발간했다. 세 PD의 도시 미식기행은 목포에서 멈추지 않았다. 올 여름에는 <세 PD의 미식기행, 여수>가 발간 됐다. 세 PD의 미식기행이 특별한 것은 다큐멘터리 PD들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음식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음식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일까. “기본적으로 먹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고 말문을 연 그는 웃음을 보였다. 맛에 열광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 맛집 추천 글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게 됐다. 손 PD는 기존의 음식과 관련된 글 또는 방송과 다르게 음식의 인문학적, 역사적 배경을 깊이 있게 다룬 점이 특별하다고 말했다. “출장을 많이 다녀서 다양한 지역의 음식을 접할 기회가 많아요. 요즘은 유명한 식당을 소개하는 형식의 글이 많은데, 저희는 지역 고유의 음식을 다큐멘터리처럼 파고 들어가 보자는 취지에서 집필을 시작했죠”

손 PD에게 집필 활동은 다큐멘터리 제작의 연장선상이다. 영상으로 전달하기 힘든 부분이나 전달하지 못했던 부분이 글을 통해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에는 다큐멘터리의 영향을 받아요. 다큐멘터리 PD라는 직업이 직접 현장에 나가 취재를 많이 하는데, 그 경험들이 글로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이템 선정부터 취재, 촬영, 편집까지. 하나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완성되기까지 PD의 일상은 오직 프로그램만을 위해 돌아간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PD의 삶을 살면서 손 PD는 작가 손현철 그리고 사진가 손현철로의 삶도 살아가고 있다. 그는 사진 그룹 ZAKO의 일원으로 프로젝트 촬영 및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도 하고 있다. 세 가지 직업을 가진, 조금 특별한 그가 평소 즐기는 문화생활은 무엇일까.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평소 공연 보는 것이 취미인 손 PD는 현대 무용 공연에 특히 관심이 많다고 한다. “무용 공연을 좋아해서 무용 전문가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개인적으로 공연에 대한 평을 작성하는 활동도 하고 있어요” 손 PD는 인물, 동물, 자연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PD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호기심있는 분야를 지식으로 확장하라
미래와 가능성이 있기에 끊임없이 고민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손 PD는 호기심 있는 분야를 하나 만들고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면,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은 무엇인지, 사진 분야의 대가는 누구인지 등 호기심을 지식의 확장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해요. 관심 분야에 깊이 파고드는 오타구의 기질도 분명 필요하죠” 그는 학생들의 지식 확장에 도움이 돼야 하는 교육의 역할이 부족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주변 환경이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스스로라도 길을 찾아야 해요. 제가 만든 프로그램이 길을 찾는 일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특히 PD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손 PD는 진심어린 조언을 건넸다. “PD가 되려면 영상을 잘 만들어야 해요. 영상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많이 보는 것이 중요하죠. 스토리 라인과 구조를 생각하면서 보세요. 가령 <개그 콘서트>를 보면서 단순히 웃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영상이 왜 재미있는지 어떤 부분이 나에게 감동을 주는지’ 의문을 갖거나 ‘만약 내가 똑같은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어떻게 할까’ 고민해보는 것도 좋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손 PD는 편집 중이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를 통해 만난 다큐멘터리는 더 이상 지루하고 딱딱한 교양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오해가 사라지고 남은 빈자리는 앞으로 그가 보여줄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으로 채워졌다. 작업에 열중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일에 대한 순수한 애정과 열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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