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칼럼]

지난달 27일(월), 숙대신보사는 창간 59주년을 맞았다. 의례적으로 치러온 연례 행사였다. 반세기 넘는 기나긴 역사를 지나간 기자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기자들에겐 숙대신보사의 일 년은 의미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의미 있는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신보사를 이뤄냈다.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짧고도 긴 시간 동안 우리네 신문은 격동의 세월을 견뎠다. 한 때 언제 어디서든 숙대신보를 심심치 않게 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의 발달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이제는 신문을 통해 소식을 접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한국언론재단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가구별 신문 구독률은 1996년 69.3%에서 2012년 24.7%로 6년 사이 1/3가량 감소했다. 현재까지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종이신문이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그와 동시에 학보사도 위기를 맞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학보사는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학우들의 관심을 구걸하고 있다. 기자들 사이에선 학우들이 학보사의 존재를 아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소리가 흘러 나온다. 요즘 대학 학보사들의 고민은 학우들이 우리네 신문을 읽게 하는 것. 왜 이토록 우리는 학우들에게 신문을 보라고 소리칠까. 신문은 읽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기 때문에? 단지 그뿐일까.

학보사의 신문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 바로 당신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과 우리가 사는 작은 사회에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첫 걸음이다. 초등교육 때부터 줄기차게 배워온 공동체를 위한 삶을 이제는 실천으로 옮길 때가 되지 않았는가. 첫 발을 내딛고 소리를 질러라. 그것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작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학보사는 그런 당신들에게 확성기가 돼줄 것이다.

확성기는 언제나 켜져 있다.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곳을 찾아갈 것이고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곳을 찾아가기도 할 것이다. 겁낼 것 없다. 학보사는 융통성 있게 소리를 조절해 가며 소리에 담긴 의미를 전달할 테니까. 힘을 합쳐 우리의 작은 사회를 이따금씩 깨워야한다. 깨어난 사회는 당신들과 우리에게 보다 안락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힘쓸 것이다. 때문에 당신들과 우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목소리가 없으면 확성기는 무용지물이고 확성기가 없으면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당신들이 있어야 우리가 존재할 수 있고 우리가 있어야 당신들이 말할 수 있다.
당신과 우리의 연결고리이며 이건 우리 안의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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