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감정 결과, 두 사람 사이에 혈연적 부자 관계가 성립한다” 지난 6월, 한 재판장에서 들려온 소리다. 바로 그 날, 1년 6개월 동안이나 이어져 온 친부 찾기 재판이 막을 내렸다. 이 재판은 단순한 친자 소송이 아니다. 한국 최초로 ‘코피노 친부 찾기 재판’에서 승소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코피노 친부 찾기 재판 최초 승소.’ 그들은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름 석 자와 사진 한 장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코피노 아버지로부터 협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아이들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받았다. 과연 그동안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코피노, 그들은 누구인가
‘코피노(Kopino)’란 한국인(Korean)과 필리핀인(Filipino)의 합성어로 한국인 아버지와 필리핀 출신의 어머니를 둔 혼혈아를 일컫는 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는 없었다. 점차 그 수가 급증하면서 5년 여 전부터 코피노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다. 자국민의 인구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필리핀에서 한국 사회가 코피노의 정확한 인구를 집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현재 코피노는 대략 3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코피노가 증가하는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먼저 필리핀 내부에 활성화돼 있는 불법 성매매를 꼽을 수 있다. 사단법인 한국코피노협회 한문기 협회장(이하 한 회장)은 “심지어 최근 필리핀에서는 불법 성매매를 접목시킨 접대성 관광 상품도 성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한 회장은 “피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천주교 사상에 따라 낙태가 금지돼 있는 필리핀 사회의 문화도 코피노 증가의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한국 남성들의 잘못된 성 의식 역시 문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코피노 아버지들이 대부분 20대 청년층이라는 것이다. 코피노 인권단체 ‘Asian Bridge for Children’ 김훈호(명지대, 26) 팀장(이하 김 팀장)은 “청소년이나 대학생과 같은 젊은 유학생들이 불법 성매매의 주요 고객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필리핀코피노협회 임광수 협회장(이하 임 회장)은 “남성들이 여성과 관계를 가질 때는 그에 대해 책임을 가져야 하는데 코피노 아버지들은 그렇지 못했다”며 한국 남성들의 무책임함을 꼬집었다.

◆ 코피노가 마주한 현실은
우리나라 대중매체에서 비춰지는 코피노의 모습은 그리 좋지 않다. 사회적 냉대 속에서 자랄 뿐 아니라 그들은 필리핀에서 사회 문제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한 회장은 “코피노 가정이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필리핀 사회가 코피노 가정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 “몇몇 코피노들은 자신이 한국인 2세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코피노 어머니에 대한 시선도 나쁘지만은 않다. 한 회장은 “필리핀 여성들은 모성애가 매우 강하고 주체적”이라며 “이 때문에 필리핀 사회는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면 여성이 홀로 자녀를 키우는 것에 긍정적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선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안정됐다고 말할 순 없다. 대부분의 코피노 가정의 생활수준은 매우 낮은 편에 속한다. 임 회장은 “남편 없이 어머니가 홀로 생계를 책임지는 탓에 코피노 가정은 열에 여덟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며 “화장실도, 수도시설도 없는 한두 평 규모의 방에서 생활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마저도 어려운 가정도 있다. 한 회장은 “코피노 어머니들이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다보니 친척들에게 맡기기도 하며, 어머니가 과로로 사망하면서 고아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코피노를 힘들게 하는 건 경제적 상황만이 아니다. 코피노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상처로 남아있다. 김 팀장은 지난 2월 5일부터 18일까지 2주간 필리핀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한 시골 마을에서 8살 ‘재웅이’를 만났다. 재웅이의 어머니는 성매매를 통해 재웅이를 갖게 됐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아이의 아버지가 한국으로 떠난 후였다. 김 팀장을 처음 봤을 때 재웅이는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쓰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재웅이는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 웃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고 헤어지는 날에는 눈물까지 글썽였다고 한다. 김 팀장은 “재웅이는 남자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어색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며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으로 돌아가버린 남편과 아버지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찾을 수 있다. 코피노 아버지의 얼굴, 이름,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면 아이의 아버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한국인 남성이 아이의 존재부터 필리핀 여성과의 관계까지도 전면 부인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을 찾아온 코피노 어머니를 협박하고 겁주기도 한다. 한 회장은 “한국인 남성들은 코피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 이젠 그들의 손을 잡아줘야 할 때
최근, 한국 사회는 코피노에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다. 코피노와 관련한 단체들도 생겨났는데 필리핀코피노협회와 한국코피노협회가 대표적이다. 먼저 필리핀코피노협회는 필리핀에서 코피노들과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기본적인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새로운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특히 임 회장은 “코피노도 결국은 한국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코피노협회 역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코피노를 돕고 있다. 코피노 가정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안정된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기업과의 협약을 통해 장학금을 전달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김 팀장을 중심으로 몇몇 대학생들이 ‘Walk with Kopino’라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이 캠페인은 ‘한국인 2세 아이들을 위한 아시아의 다리가 되자’는 목표 아래 한강의 모든 대교를 건너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외에도 모국방문 캠페인, 삶의 터전 마련하기 등의 활동도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코피노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있다. 바로 코피노에 대한 홍보활동이다. 한 회장은 “많은 사람들이 코피노에 대해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며 “캠페인이나 미디어를 통한 홍보활동으로 코피노를 알리고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정확히 직시하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지금 코피노 문제를 정확히 짚고 넘어감으로써 한국 사회의 잘못된 성문화부터 ‘라이따이한’이나 ‘코시안’과 같은 한국인 2세의 미래까지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피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 회장은 “한국과 필리핀 각지에서 이뤄지는 코피노 홍보활동이나 캠페인에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특히 대학생들이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팀장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코피노를 책임지는 건 결국 필리핀 여성들이다. 같은 여성으로서 여대생들의 관심과 목소리가 코피노들에게 더 큰 힘이 될 것”이라며 “숙명여대 학생들도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알고 함께 목소리를 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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