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칼럼]

이번 여름, 뒤늦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부모님과의 말싸움이 잦아졌다. 부모님은 내게 이기적이라 꾸짖으셨고, 나는 부모님께 간섭이라고 소리쳤다. 나이만큼 높아진 자존심 때문에 화해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고, 서로를 이해하기엔 너무 멀리 온 건 아닐까 고민했다.

그러던 중 고독사에 관한 다큐를 찍게 됐다. 두 세 달간 6명의 발자취를 찾아야 했는데, 사회적 문제로 시작했던 물음표는 ‘가족’이라는 주제를 향하게 됐다. 다양한 주변인들을 만나봤지만, 6명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그들의 가족을 이해해야 했다. 싫든 좋든 6명의 삶에는 각자의 가족이 녹아있었고, 가족들의 삶에도 그 6명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은 나의 자화상이자 누군가의 초상화다. 얼핏 보면 내 얼굴이지만, 다시 보면 가족 구성원들의 얼굴이 보인다. 낯설다가도 익숙하고 싫다가도 좋은 묘한 감정이 가족이라는 인물화를 그려낸다.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기에 가족관계는 쉬우면서도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쉽다고 여긴 나머지 가족 간의 거리를 무시한 채 내달린다. 가족 안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내게 있어서 가족의 의미를 먼저 따져보곤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모이기에, 딸이기에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며 그 지위에 맡는 역할을 다하길 기대한다. 이러한 역할은 가변적이고 같지만 서로 다른 인격체라는 사실을 알고있음에도 평소 우리는 망각하고 지내는 경우가 더 많다.

가족과 장거리 레이스를 달리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적정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가까워지면 서로의 경계를 침범해 다칠 수 있다. 반면, 자신의 라인 안에서만 집중해서 혼자 결승점에 도착하는 것도 완주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가족 관계는 서로의 거리를 인정해야 결승점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추석이다. 요새는 매년 가족과의 갈등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잠시 감정을 내려놓고 나는 가족에게 어떤 존재인지 가족과 그 관계의 거리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으면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침범하진 않았는지, 한 발자국만 떨어진 채로 낯선 느낌으로 함께 걸어보자. 적정한 가족 간의 거리는 오히려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소통의 다리가 될지도 모른다.

손지윤(역사문화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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