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욱 교수의 허심탄회]

 

나이를 문제 삼기보다는
친구라는 개념 자체에 집중해야
진정한 친구 가리는 기준 없어

친구라는 존재는 우리 삶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물론 이 말은 때로 주체성 없는 행동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표현에는 어디든 함께 할 정도로 믿을 만한 존재가 바로 친구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런 친구가 있다면 정말 든든하겠죠. 졸업을 앞둔 질문자는 지금 지나간 대학 4년의 시간 동안 마음을 털어 놓고 믿을 수 있는 친구를 사귀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는 듯 보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질문자가 가진 어려움엔 역설적이게도 질문자 스스로 만들어내고, 키워간 측면이 있습니다. 질문 내용을 살펴보면, 나이 차이에 신경을 쓰고 이를 전제로 인간관계를 시작한 사람은 오히려 질문자 자신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스스로의 표현대로, 질문자는 ‘동갑 친구’는 한 명도 못 만나고, 모두 ‘동생’들만 사귀게 된 거죠. 이로부터 질문자의 결론은 (동갑이었으면 가능했을 텐데) 동생들이라 진정한 친구를 못 만났다는 것이고요.

짐작하시겠지만, 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닌 것을 문제 삼은 것은 바로 질문자 자신입니다. 만약 동기생들과의 관계에 어떤 형태로든 엇박자가 있었다면, 과연 그 모든 것의 유일한 원인이 질문자가 단지 재수했다는 사실, 다시 말해 단 1살이 더 많다는 이유에서였을까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질문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중대한 사회 문제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최근 몇 년 간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중 3분의 1이 바로 재수생이기 때문이죠. 과연 그들 역시 모두 질문자와 동일한 문제로 고민 중일까요?

때문에 질문자는 ‘나이’와 ‘친구’ 사이에 있을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관관계에 몰입하기보다는 친구라는 개념 자체에 집중해보는 것이 더욱 의미 있어 보입니다. 약간 따분하더라도 질문자가 사용한 ‘진정한 친구’라는 말에 놓인 의미를 잠깐 생각해보죠. 도대체 무엇이 진정한 친구일까요?

질문자에게 만약 자신이 말한 의미의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그와의 우정을 싹틔우고 나눈 시기는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먼 과거일 것입니다. 역으로 현재를 포함한 그 이후 질문자의 활동 장소들은 ‘진정한 친구’를 찾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닐 수 있습니다. 특히 대학은 순수한 우정을 키우는 곳이라기보다는 구성원 각자 자신이 설정한 비전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교한 설계와 준비를 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즉 대학은 동일한 친구이되 파트너십을 키우기에 더욱 적절한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이 파트너 친구들이 질문자가 원하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을까요? 사실을 말하자면 진정한 친구를 가리는 기준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친구란 단지 좋은 친구를 가리키는 문학적 표현에 불과한 거죠. 나아가 좋은 친구란 삶의 성장을 위해 서로 도움이 되는 친구를 말합니다. 서울 쥐와 시골 쥐는 단지 각자가 처한 서로 다른 환경의 삶을 살아갈 뿐, 어느 한쪽의 생활 방식이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엔 서울 친구, 시골 친구가 있을 뿐 진정한 친구란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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