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여자고등학교 김명현

떠남과 돌아옴

 

 성경의 유명한 일화들 중에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있다. 젊은 아들이 도시로 떠나 재산을 흥청망청 써버리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언뜻 들어서는 어리석어 보이는 이 이야기가 아름다운 까닭은 뭘까? 그 이유는 탕자의 떠남에, 혹은 돌아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아름다운 까닭은 아버지의 기다림에 있다. 문을 잠그지도 못하고 깊은 장에 빠지지도 못한 채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 말이다. 즉, 떠남과 돌아옴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사이에 기다림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대한민국의 기다림은 많은 이들을 아프게 만들었다. 돌아옴으로 끝나야 할 기다림이 끝날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꽃같이 피어나야 했을 우리들은, 차디찬 바다로 가라앉아 버렸고 다녀왔습니다로 끝났어야 할 이들의 여행은 시작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마지막 날 밤,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 부모님을 생각하며 찔끔찔끔 흘려내야 했던 우리들의 눈물은 얼어붙은 우리 앞에서 흘러 넘치는 부모님의 눈물이 되어버렸다. 온갖 sns와 인터넷에 그들을 향한 기다림이 넘실거렸지만, 수많은 글과 그림이 공유되고 작은 노란색 리본이 우리나라를 뒤덮었지만 나는 이 기다림을 아름답다고 부를 수 없었다. 우리들의 돌아옴이 아닌 시신이라도 온전했으면 하는 소망을 말하는 그분들의 기다림을, 나는 감히 아름답다고 칭할 수 없었다.

반면 절대 아름답지 못한 기다림도 있었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제일 잔혹한 이 떠남을 이용했고, 이득을 취했으며 누군가는 싸움을 벌렸고, 누군가는 한낱 유흥거리로 전략시키고, 누군가는 자신을 포장하려 거짓을 만들어냈다. 모든 게 ‘기다렸다는 듯’ 일어난 일이었다. 돌아오지 못할 이들을 기다리는 일이 점점 흙투성이가 되어가는 것은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됐을 내 눈에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눈을 감으려 애썼고 듣기 싫다고 귀를 막았으며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돌아오지 못할 이들을 기다리는 일에서 관심을 끊고 싶어했다. 심지어는 수험생이라는 변명거리까지 내세우며 우리들의 떠남에서 시선을 돌렸다. 돌아올 사람은 돌아올 것이라는 무책임한 생각만을 반복했다. 나의 기다림은 정말이지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던 중이었다. 학교의 한 친구가 결석을 했다. 결석이유는 사촌동생의 발인에 가기 위해서였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 동안 내가 해왔던 생각들이 유리조각이 되어 박히는 기분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날은 하루 종일 유리조각들이 날 괴롭혔다. 상관없는 일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제야 그들의 떠남이 우리들의 떠남이 되었고 그들의 돌아오지 못함이, 그들의 죽음이 우리들의 죽음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우리들이 떠나버린 후였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후였다. 아름답지 않은 게 아니라 아름답다 부를 수 없는 기다림을 행할 기회는 나에게 없었다. 구호물품과 모금을 학생회로서 진행하면서도, 속이 따끔거리는 것을 없앨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죄를 지은 것 만 같이 느껴졌고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떨어야 했을 우리들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속에 박힌 유리조각을 없앤 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작년 즈음에 본 책에서 베껴놓은 내 낙서였다. 약간의 각색이 들어간 듯 내 기억과는 조금 달랐지만, 낙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고도를 기다리나요?”

 “응. 고도를 기다려.”

 “고도가 올지 안 올지 모르는데도요?”

 “모른다 해도.”

 “고도가 오지 않아도 그를 기다린다고요?”

 “그래. 그래도 나는 고도를 기다려.”

여자는 활짝 웃었고, 곧 그를 끌어안았다.

 

이 낙서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돌아오지 않는 자를 기다리는 것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그 기다림은 슬프고, 애통하고, 그만두고 싶을 만큼 아프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우리들이 수학여행을 떠났던 것도,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린 것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그 아이들을, 우리들을 기다려 볼 생각이다. 떠남과 돌아옴의 사이에 기다림이 있다고 한 나의 생각은 그대로이지만 돌아오지 않을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이 기다림을 감히 ‘아름답다’고 칭해줄 것이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 이루어낼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이 기다림을 내가 온전히 아름답다고 부를 수 있을 때 떠남과 돌아옴 에서도 각각의 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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